#8: 부처의 눈과 돼지의 눈
나는 긴장하면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긴장이 치솟아 대기권을 빠져나갈 때면 뺨에서 시작된 홍조가 귀를 거쳐 부지런하게도 목까지 내려온다. 더 슬픈 건 얼굴이 붉어지면 이상하게도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는 거다. 링 위 싸움에서 진 복싱 선수 같은 기분이었다. 패배자가 된 기분. 얼굴이 달아오르면 시작한 적도 없는 싸움에 지고 존재하지도 않은 상대에게 한없이 얻어맞는 듯한 요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래서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하면 사고가 약간 마비되면서 온 신경이 거기로 쏠렸다. 신경을 쓰면 쓸수록 더 붉어지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진정해 보려고 하지만 그게 되냐고, 안 되지.
언젠가부터 나는 무대나 단상 위에 있는 사람의 불안 정도를 파악하는 척도가 ‘얼굴이 얼마나 붉어졌나’가 되었다. 낯빛이 홍조를 띠지 않으면 긴장을 안 한 상태, 살짝 붉어지면 조금 긴장 상태, 얼굴이 아주 빨갛게 물들면 극도로 긴장한 것으로 생각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발표 불안 증상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전에는 내 기준이 일반적인 거라고 생각했다. 긴장하면 얼굴이 붉어지는 건 딱히 특이할 것 없는 자율신경계의 반응이니. 그런데 아주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발표 불안의 정도를 따지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판단의 잣대가 목소리의 떨림, 무릎 움직임, 손 떨림, 시선 처리, 몸짓의 정도 등으로 다양했다. 그런데 스피치 학원, 발표 모임에서 만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 기준이 ‘스스로의 불안 증세’와 관련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긴장하면 목소리가 떨리는 게 너무 싫어서 그걸 꼭 고치고 싶다는 사람은 단상 위 발표자가 불안해하면 목소리가 떨리는지에 대해 먼저 살펴보게 된다고 했다. 불안증이 올라오면 무릎이 달달 떨려서 너무 괴롭다고 한 사람은 발표자의 무릎이 떨리나 안 떨리나 본다고 한다. 불필요한 몸짓과 손동작을 고치고 싶어 한 분은 말하는 사람의 제스처가 제일 눈에 먼저 들어온다고 했다. 긴장되면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서 불편하다고 한 분은 발표자의 시선이 어떤지가 도드라져 보인다고 했다.
스피치 모임을 함께 하는 몇 분과 세미나 자리에 같이 갈 기회가 있었다. 세미나가 끝난 뒤 근처 카페에서 차를 한잔하는 자리에서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강사가 무대 경험이 많나봐요. 전혀 긴장을 안 하더라고요.”
“그래요? 꽤 떠는 것 같던데.”
“제가 봐도 그랬어요. 불안해하는 게 느껴져서 저도 같이 긴장됐어요.”
금융 IT 관련 세미나였는데 발표 불안인들답게 우리의 대화 주제는 ‘발표 불안’이 먼저였다. 나와 한 사람은 강사가 ‘전혀’ 긴장을 안 했다고 느꼈고 나머지 두 사람은 강사가 꽤 떠는 게 보였다고 했다. ‘어, 이상하다?’ 싶었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불안을 평가하는 각자의 기준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 세미나 발표자는 얼굴이 전혀 붉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긴장한 기색을 그리 못 느꼈다. 무릎 떠는 게 콤플렉스인 사람은 “그 긴 시간 서서 무릎 한 번 떨지 않고 잘하던데?”라고 했다. 목소리 떨림을 고치고 싶어 한 나머지 두 사람은 “목소리가 중간중간에 여러 번 떨렸어요”라고 했다.
내가 재미있다고 느낀 지점은 나는 발표자의 목소리 떨림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거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는데 발표자의 얼굴이 사이사이에 여러 번 붉어져서 ‘아이고, 긴장 많이 했구나’ 싶었던 상황에서도 나와 다른 증상이 있으신 사람들은 그 얼굴 붉어짐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는 “강사가 긴장했다고요? 전혀 안 그랬던 거 같은데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럴 수가. 저게 눈에 안 보인다고? 전혀? 내가 그렇게도 감추고 싶어 했던 내 콤플렉스가 실은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게 내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자존심과 자신감을 꾸역꾸역 좀먹었던, 내 열등감의 원인이었던 안면홍조가 어떤 이의 눈에는 ‘감지조차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이 너무나 뜻밖이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처럼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처럼 보이는 건가?
내가 타인에게 드러내기를 꺼리는, 감추고 싶은 부분이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일 수도 있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던 ‘긴장 시 얼굴 빨개짐’이 실은 어떤 이에게는 전혀 보이지도 않는 것이었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이 사실을 알고 난 후 나는 얼굴의 열감에 조금씩 덜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조금만 달아올라도 어떻게든 가라앉혀 보려고 애쓰는 대신 발표 내용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