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돌아온 답을 듣자마자,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오늘을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내게는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들이, 말하자면, 영화 같은 일들이 발생했다.
바로 전날, 엄마는 예고했다.
"할아버지가 중환자실에 계셔. 곧 돌아가실지도 모르니, 며칠은 언제든 엄마가 있는 도시로 올 준비를 하고 있어."
"엄마, 돌아가시고 찾아뵙는 게 무슨 의미야. 지금 갈게"
"COVID-19 때문에 이모랑 삼촌들도 못 들어가. 그리고 이미 의식이 없으시니, 찾아와도 의미가 없어. 그러니 채비만 잘하고 있어"
다음날 아침,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당분간은 트레이닝 복을 하나 가방에 챙겨서 다녀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검은 옷을 입고 출근했다. 8시 반에 사무실 책상에 앉았는데, 9시쯤 엄마 전화가 왔다. 핸드폰 화면에 '엄마'가 보이는 순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인 걸 알았다.
"바로 갈게"
"오지 말고, 서울에 네 동생 다니는 병원으로 가"
"응? 장례식장이 아니고?"
15년가량 신장 투석을 하고 있는 동생에게, 이식이 가능할지도 모를 신장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엄마는 두 연락을 비슷하게 받았다고 했다.
잠시 멍해져 있는 동안, 엄마가 쏟아낸 얘기는 엄마는 맏이여서 장례식장도 지켜야 했으나, 동생 역시 이식 수술에 보호자가 필요하다. 엄마와 아빠는 할아버지 장례식장을 벗어날 수가 없어서, 그러니 누나라도 보호자로 동생 옆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급히 전화를 끊고, 회사를 나왔다. 회사의 동료들은 당장 회사의 조기를 들고 나를 함께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나는 막 이직한 상태여서, 회사 동료들과의 친분이 많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에게 장례식장이 아닌 동생 병원으로 간다는 얘기는 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오겠다고 해주는 것은 고마웠으나, 엄마가 그들을 맞이하는 것에 너무 어려워할 것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달가웠던 적 없던 이름 COVID-19을 핑계로, 조문을 사양했다.
그렇게 나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 가겠다고 회사에 말하고는, 동생의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뇌사자 분에 대한 생각을 되뇌었다. 동생에게 맞는 신장을 가진 기증자가 나타나길 십여 년을 기다렸다.
그날이 집안에 누군가가 영원히 우리를 떠나는 날이 될지는 나만이 아니라, 아무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 자식의 건강 문제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무슨 감정을 표출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목소리였다. 전화 넘어서도 그 긴장감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장인어른과 그렇게 교류하지 않았던 아빠는, 아주 상반되는 목소리로 들떠 있었다.
"우연일지라도, 할아버지가 가시는 길에 큰 유산을 남겨준 거야."
내가 병원에 당도하니, 동생은 건강해지고 나서 하고 싶은 것들을 적고 있었다. 그 목록에는 내가 평상시에 동생이 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던 것들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 누군가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건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간호사 선생님은 동생이 이식 대기자 중에 2 순위자라고 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해서 신장이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일치하는지를 미리 확인해보고, 신장이 오자마자 수술을 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 순간에 나는 사람의 신장이 두 개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아 1 순위자의 어느 부분이라도 일치하지 않아야 동생에게 순번이 돌아오겠구나 했다.
동생은 무지한 누나를 나무랐다.
"누나, 사람 신장은 2개야. 2순위면 당연히 나도 대상이 되겠지. 더군다나 1 순위자는 이미 한번 이식받았던 분 이래. 그러니 이식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겠어?"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누군가가 뇌사상태에 빠져야만, 기증이 가능한 신장이 생긴다. 돌아가신 분이 다니던 병원에 대기자가 있다면 여기에 우선순위가 생긴다. 나는 이 사실을, 그날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그 뒤에 같은 권역에 있는 대기자에게 후순위의 우선순위가 생긴다고 한다.
그날은 기증자가 있던 병원에 대기자가 있었다. 두 개의 신장 중에 하나만이 동생이 있는 병원을 온다고 했다. 1 순위자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동생에게 순서는 돌아오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늘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한다. 설혹 그것이 내 문제일지라도. 어쩌면 내 생각이 오던 복을 쫓아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속으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1 순위자는 한번 이식을 해봤으니, 그 자유를 이미 잘 알고 않을까? 다시 기회가 온다면, 다른 이를 위해 양보할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네 시간쯤 온갖 검사를 하고 앉아 있었을까, 간호사 선생님이 호출했다.
"1 순위자께서 이식을 받으실 수 있고, 그러기를 희망하셨어요. 아마 이제 순위 연락이 가기 시작했으니, 곧 또 좋은 소식 있으실 수 있어요."
나는 택시를 불러, 동생과 함께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으로 돌아갔다. 엄마와 아빠는 장례식장을 알아보고 시신을 안치하던 와중에도, 새로운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겠지. 실망한 기색을 숨기려고 애쓰고 있는 동생 앞에서, 실망할 것이 뻔한 엄마 아빠한테 전화로 이야기를 전할 자신이 없었다. 문자 하나로, 그 이야기를 대신했다.
“지금 거기로 가고 있어”.
엄마는 동생이 괜찮은 지를 확인했고, 나는 괜찮은 척하느라 애쓰고 있다고 답했다.
동생이 처음 신장 투석을 하게 되었을 때, 당연히 가족이 이식해줄 수 있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신장이 약한 건 가족력이었으니, 엄마나 아빠도 신장이 1개만 있어도 기능을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젊은 나는 상대적으로 기능은 하고 있었으나, 출산의 계획이 있는 여자에게는 이식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임신에 신장 기능이 중요하다나.
나는 임신을 간절히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이식을 해야겠다고 우겼으면 밀어붙일 수도 있었다.
엄마 아빠에게 하지 않았던 얘기지만, 그 시기의 나는 매일 체한 상태여서 한 달 즈음을 이온음료만 마셨다. 불면증도 함께였다. 갑상선이니 간이니 검사해도 이렇다 할 병명이 없던 차에, 부신이 기능을 하고는 있지만 그 기능이 너무 많이 떨어졌다는 결과를 받았다.
나 역시도 어려서부터 자주 앓는 아이였다. 가정에 돈을 버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가 이식을 해주면 앞으로의 모든 보험도 거절될 것은 뻔했으며, 내 생활에도 제약이 있었다. 임신이야 그리 간절하지 않았지만, 내가 지금보다 더 건강하지 않을 때 우리 가족은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바라보거나 넘어갈 수 있는 사다리를 태워 당장의 땔감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심지어 한번 이식한다고 해도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식을 결심할 수 없었다.
택시에 앉아 내 면허증을 꺼냈다. 내 면허증에는 장기이식 희망자의 증표가 붙어있다. 동생이 처음 투석을 시작하며 장기 이식 대기자 명단을 작성할 때, 가족 중에 이식을 할 희망자가 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행여, 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더라도, 동생에게 이식을 해줄 수는 있겠지 싶어 이식 희망 신청을 해 두었다. 그래야만, 어느 날 내가 뇌사자가 되더라도 1순위로 동생이 이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후에 돌아와, 장기이식 증표가 붙은 내 면허증을 보며, 내 장기이식 증표가 어딘가에서 꺼내지는 날에 내 신장을 이식할 우선순위 중 첫 번째는 동생이겠구나 하고 곱씹었다. 그리고, 만약 동생이 이식을 받은 후라면, 사회로 환원이라도 할 수 있겠지 하면서.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엄마는 그날 남들보다 더 많은 비극을 접하고도 표정이 없었다. 오히려, 실망한 기색을 아들에게 들킬까 싶어 미소 짓고 있는 척을 하느라 얼굴에 경련이 내게 보일 지경이었다.
아빠는, 참 이기적 이게도, 빚뿐인 할아버지의 유산 중에 동생의 새 생명이 남아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