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엄마는 울지 않았다.
옆을 돌아보니 엄마는 울지 않았다. 할아버지 영정 앞에서. 빈소에서. 가족들 앞에서.
과연 슬프기는 한 것인가, 그저 더 이상 봉양할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에 안도하고 있는 건가 나까지 슬픔의 감정에 빠져들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는 엄마의 생에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보호를 받은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영정을 부여잡고 놓을 생각이 없는 큰 이모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 할아버지는 따뜻한 어른이었다.
학교에 등교하는 손녀를, 쌀을 배달하던 오토바이 뒤편에 쌀 대신 나를 싣고 학교에 매일 등교시켜주는.
학교가 끝나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할아버지의 가게에 들리면 하드 하나씩을 사서 들려주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잠시 잠깐을 멈추고 돌이키면 금방이고 그리워졌다.
할아버지가 더 이상 새로운 벌이를 하지 않는 동안 나는 나이를 먹고 직업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는 돌아보니 할아버지가 미련스럽다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린이가 되는 건가 싶은 정도여서, 엄마가 저렇게 멍한 표정으로 영정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공감되지 않았다.
엄마는 공부를 잘했다고 했다. 중학생이던 시절에는 전교 1, 2등은 늘 해왔다고.
그래서 자식들이 공부를 못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늘 얘기했다.
그런 엄마는 다른 사람과 살림을 차린 할아버지 대신 고등학생 때부터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장녀였다. 오죽하면 당시 엄마의 선생님이 다 큰 엄마를 불러, 그런 환경으로 인해 학교를 그만둬야 한다면 입양처를 알아봐 주겠노라 했다고 한다.
맏이였던 엄마는, 입양을 가면 넷이나 되는 동생들의 졸업을 위해 큰 이모가 다시 희생할 것이 걱정스러웠다. 결국 몸 약한 큰 이모에게 다시 희생을 대물림하는 것 같아 전화교환원으로 일을 하며, 동생들이 학교를 졸업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했다.
띠동갑의 막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어느 동생 하나 본인이 간절하게 원하던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렇게 집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어른으로서 책임감 있는 삶은 사는 방법을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던 엄마는, 집을 떠나기 위해 결혼을 선택했다. 할머니는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 급급했고, 할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다 할 롤 모델이 그 시절의 엄마에게는 없었다. 회피가 목적인 선택이 대부분 그러하듯, 엄마의 결혼은 엄마를 만족스럽게 하지 못했다. 자신의 엄마와 다르게 살겠다는 다짐을 가지고 한, 결혼일랑 무엇이 달랐을까.
그렇게 엄마는 일평생을 할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할머니를 향한 연민과 애증을 가지고 살았다. 할아버지에게는 애증 한 톨도 남아있지 않은 듯, 그렇게 영정사진 앞에서 아주 약간도 그렁거리지 않은 채로 장례식을 마무리했다. 발인하기 전, 나갈 돈이 얼마인지 계산하고 들어온 부의금을 배분하는 모습은 마치 엄마가 장례지도사인 것처럼 비쳤다. 상복만 입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오해했을 정도로.
엄마와 두 살 터울의 큰 이모는, 엄마와는 너무나도 대조적 이게도 영정 앞에서 통곡을 하였다. 얼마 전에 결혼한 이모의 딸은, 그저 그런 이모를 모르는 척했다.
이모의 사위는, 불과 한 달 전에 한 식구가 되었다. 사위가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는, 이모는 본인의 일생에서 가장 극대화된 감정을 쏟아냈다.
이모의 아들은, 부의금을 접수한다고 앉아,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각자 그 집의 사정이 있듯이, 엄마와 나와는 반대로 이모네는 자식은 울고 손주들은 무관심한 그런 얼굴이었다.
이모는 어릴 적 한참을 아팠다고 했다. 너무 오랜 기간 하혈을 해서 죽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할 정도로.
병원에서도 답을 못 찾는 사람들이 대게 그러하듯이, 할머니는 종교에서 믿음으로 해결이 되지 않을까 하고 기원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싫다는 할아버지를 끌고 교회를 나갔다.
공교롭게도 그즈음 피가 멈추었다. 그렇게 이모는 본인을 안고 아동 바동 하던, 본인을 위해 기도하던 아버지의 모습만 기억하는 듯했다.
COVID-19도 있었지만, 엄마의 형제들은 내성적이었다. 덕분에 손님은 많지 않았을 뻔했다. 하지만 작은 이모는 사람을 상대하는 업을 하고 있었다. 작은 이모는 연신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언니들이 어떤 마음인지 돌이켜볼 정신도 없어 보였다.
이틀 밤낮을 꼬박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작은 이모는 큰 소리 한 번을 내지 못하는 순한 사람이었는데, 오는 손님들은 모두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가진 호탕한 아저씨들이었다. 나는 그제야 이모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화물차량들의 행선지를 조율해주는 사무직이다 보니, 이모의 지인들은 자신의 일이 끝나자마자 달려오느냐고, 찾아오는 시간이 그렇게 대중없었다고 한다.
이모의 손님으론 목소리가 크고 술을 많이 드시는 분들이 오셨고, 그분들이 없었다면 적막했을 상갓집은 덕분에 조금이나마 슬픔을 잊은 공간이 되었다. 덕분에 음식을 날라주고 손님들 동태 살피기에 정신없는 숙모들은, 아마도 엄마와 큰 이모의 감정 차이를 못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작은 삼촌은 간혹 오는 본인의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계속 자리에 앉아있었다. 큰삼촌은 그래도 상주라고 계속 서 있었는데, 사실은 일을 하지 않은 기간이 오래되어 손님이 정말 없었다.
큰삼촌은 정해진 의무를 하는 사람이지,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거동 불편한 할머니가 멍하니 영정사진과 그 앞의 둘째 딸을 바라보고 있을 때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 어린 날의 할머니는 억척스러웠다. 80년대에는 쌀 도매상을, 90년대에는 슈퍼마켓을 할 정도로 시대를 따라가는 눈도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퉁명했지만, 장사 수완을 십분 발휘해서 항상 상냥하게 손님들을 대했다. 그래서 동네에 비슷한 가게들이 있었음에도 할머니의 가게에는 늘 사람이 붐볐다.
그런 할머니는 사람 만나는 요령도 없는 할아버지에게 오토바이 하나 쥐어 주고 쌀을, 구매한 상품들을 실어다 배달해주도록 했다. 그렇게 주로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소리쳤고, 할아버지는 구시렁대며 할머니가 시킨 일을 했다.
어린 내 눈에도 할아버지의 나지막한 구시렁거림이 보일 지경이어서, 나는 가끔 할아버지가 불쌍했다.
할머니는 대게 할아버지가 하는 일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많이 먹는다고, 손 많이 가는 음식만 찾는다고, 연탄불을 꺼뜨린다고, 일이 굼뜨다고.
그래서 나는 그 세대가 으레 그리하듯이 애정은 없으나 자식을 보고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젊은 날의 할아버지가 외도로 나가 살았던 시절이 있다고 얘기해주었다. 그 한마디로 나는 할머니가 그렇게 할아버지에게 소리를 쳤던 이유들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영정 앞에서의 할머니가 의아해졌다.
할머니는 영정 앞에서 소리 내 울었다. 나는 할머니가 울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사실, 화내는 것 말고 다른 감정도 있구나' 싶을 지경이었다. 제법 놀라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할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을 때나, 신장암으로 수술받았을 때에도 그렇게 내색 한번 안 하시던 분이었다.
평상시에도 애정과 감사를 표현하는 데 굉장히 인색한 분이라, 안부전화를 걸어도 “그래, 나 밥 먹었다” 한마디 하시고는 끊으시던 분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장례식장에서는 우는 모습을 보여주실 거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전화받았을 때, 나는 할머니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배우자의 죽음이 일생에 가장 큰 스트레스일지라도, 우리 할머니는 다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막 추석을 넘길 즈음이었는데, 할머니는 다음 명절이라도 나랑 보내고 가지 뭘 그렇게 빨리 떠났는지 혼잣말로 흐느낄 때, 나는 내가 아는 할머니 속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