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를 뉘일 곳이 없어 화장을 했다.
할아버지의 유해는 화장을 하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가족들이 할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작은 땅 한 평도 준비해두지 않았다. 화장하기로 결정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화장터로 가니, 이미 많은 가족들이 와있었다.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다는 말이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어떤 가족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어떤 사람들은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어떤 이들은 남겨진 우리는 어떡하지 하는 표정이었다.
막 장례식장을 떠나기 전, 남은 가족이 아무도 없어 당신 생에 마지막을 스스로 설계하러 오신 어느 어르신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생의 끝에는, 함께 하는 누군가가 있구나 하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끝까지 함께 하고 싶어 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는 보행기가 있어야만 이동할 수 있었는데, 화장터, 봉안당 사이는 거리가 제법 있었다. 업히는 것조차 불편해하는 할머니의 걸음에 모든 식구가 보조를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다섯 형제는 할머니가 함께 가기 위해 더욱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이동을 신경 쓰기 위해 차를 다시 배차하고, 동선을 다시 설계하던 엄마는 나지막이 짜증을 뱉어냈다. 엄마의 짜증은 놀랍게도, 할머니를 향해 있었다. 어차피 돌아가신 분을 위해 살아있는 이 자식들을 힘들게 해야 하는가 하는.
엄마는 주로 내게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편이었다. 흔히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은 공감을 하지 못하고, 공감을 하는 사람은 해결책을 제시 못한다는 선입견이 있다. 그런데도, 나는 엄마가 공감능력이 부족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엄마 덕분에 감정이입을 잘하는 편이라고 자평해왔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내가 감정이입을 하는 건 나의 삶에서 비슷한 순간을 찾아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 였구나라고 깨달았다. 할아버지의 발인 날이었다. 엄마의 짜증이 할머니를 향하는 순간, 엄마는 할머니가 느끼는 감정보다 이 순간에 엄마가 힘든 것이 중요하구나 싶었다.
어디에선가 소시오패스는 모든 사람의 감정을 못 느끼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감정보다 본인의 감정이 훨씬 많이 느끼는 거라고 했다. 심리학자도 아닌 내가, 그날의 엄마를 보고 소시오패스라는 단어를 떠올린 건 우연이었을까.
할아버지를 싫어하는 감정에 비례하여 할머니에게는 연민이 있던 엄마였다. 그런데도 그날의 엄마는 본인이 할머니를 모시는 신체의 고난이 일생일대의 스트레스라고 하는 배우자의 상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보다 크게 와닿았던 것이다.
나는 불현듯, 나의 공감능력을 돌아보았다. 나는 스스로를 흔히 말하는 투사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일이 내게 생긴다면 하고 상상을 잘하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잘 공감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나누는 대화 중에는 그 순간을 상상할 수 있지만, 현재 내가 주인공으로 벌어지는 일에서는 전혀 상대의 기분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피곤한 한 주를 보낸 애인이 곯아떨어져 약속을 잊었을 때에도, 연락을 기다리느라 보낸 허송세월에 대한 탓을 했다. 심지어는 내가 열쇠를 잃어버리고, 나를 위해 퇴근시간에 긴급하게 약속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온 동생에게도 내가 오랫동안 밖에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고 푸념을 했다.
엄마는 내게 이런 말들을 자주 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라. 네가 지금 저 사람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행동들에 이유가 있을 거다. 절대적인 건 없다. 다른 사람이 지내온 인생에서 겪어온 선택들과 결과들을 보면 지금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느끼고,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덕분에, 지난 과거를 판단하거나, 현재 내 입장을 대입해서 불가능한 일이라고 심판하는 일은 없게 훈련해왔다. 그게 내가 공감능력이 높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과 일치하게 행동하지 못한다.
특히나 자신이 못하는 행동일수록, 내지는 평생을 거쳐 그것이 단점이라고 지적받아온 행동일수록, 본인이 말로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통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소통을 못하거나, 경청하려고 이야기의 장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때까지 그 자리를 닫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가장 부족한 점들을 말로 먼저 꺼내는 사람들. 그날 나는 엄마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나에게 세뇌시켰던 많은 말들이 틀려서 훈화의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엄마 또한 부족해서 그렇게 나를 교화하려고 했나 보다. 엄마의 그 말들은, 내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내 어린 날의 할머니는 억척스러웠다. 80년대에는 쌀 도매상을, 90년대에는 슈퍼마켓을 할 정도로 시대를 따라가는 눈도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퉁명했지만, 장사 수완을 십분 발휘해서 항상 상냥하게 손님들을 대했다. 그래서 동네에 비슷한 가게들이 있었음에도 할머니의 가게에는 늘 사람이 붐볐다.
그런 할머니는 사람 만나는 요령도 없는 할아버지에게 오토바이 하나 쥐어 주고 쌀을, 구매한 상품들을 실어다 배달해주도록 했다. 그렇게 주로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소리쳤고, 할아버지는 구시렁대며 할머니가 시킨 일을 했다.
어린 내 눈에도 할아버지의 나지막한 구시렁거림이 보일 지경이어서, 나는 가끔 할아버지가 불쌍했다.
할머니는 대게 할아버지가 하는 일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많이 먹는다고, 손 많이 가는 음식만 찾는다고, 연탄불을 꺼뜨린다고, 일이 굼뜨다고.
그래서 나는 그 세대가 으레 그리하듯이 애정은 없으나 자식을 보고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젊은 날의 할아버지가 외도로 나가 살았던 시절이 있다고 얘기해주었다. 그 한마디로 나는 할머니가 그렇게 할아버지에게 소리를 쳤던 이유들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영정 앞에서의 할머니가 의아해졌다.
할머니는 영정 앞에서 소리 내 울었다. 나는 할머니가 울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사실, 화내는 것 말고 다른 감정도 있구나' 싶을 지경이었다. 제법 놀라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할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을 때나, 신장암으로 수술받았을 때에도 그렇게 내색 한번 안 하시던 분이었다.
평상시에도 애정과 감사를 표현하는 데 굉장히 인색한 분이라, 안부전화를 걸어도 “그래, 나 밥 먹었다” 한마디 하시고는 끊으시던 분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장례식장에서는 우는 모습을 보여주실 거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전화받았을 때, 나는 할머니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배우자의 죽음이 일생에 가장 큰 스트레스일지라도, 우리 할머니는 다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막 추석을 넘길 즈음이었는데, 할머니는 다음 명절이라도 나랑 보내고 가지 뭘 그렇게 빨리 떠났는지 혼잣말로 흐느낄 때, 나는 내가 아는 할머니 속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놀라웠다.
할머니와 달리 엄마는 가라앉았다.
시댁에서 사랑받는 올케를 보며, 본인이 시댁에서 받았던 서러움들을 상기시켰다.
지하 단칸방에서 생활하던 동안, 저택에 살던 친가의 할머니에게 용돈을 내놓으라고 타박받았다.
그 와중에도 아빠가 술 마시고 교회를 가지 않는 것을 엄마 탓으로 돌려, 구박했다.
근처의 시누들에게 인사 가지 않는다고 먼 곳에 사는 할머니가 친히 전화를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고도 친할머니의 직성이 풀리지 않으면, 멀고도 먼 사돈어른에게 전화해 당신의 딸이 교육을 덜 받아 그러하다고 했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싸여, 엄마와 아빠는 시댁과의 인연을 끊어버렸다.
그렇게 끊어버린 인연은, 아빠가 부도난 어음을 소화하지 못하고 도망 다니던 시절에도 발목을 잡았다. 자식 둘을 데리고 오갈 데가 없는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외갓집에 더부살이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엄마와 아빠는 교회 다니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외가 식구들은 교회를 다녔다.
그 영향으로, 향을 가져다 놓지도 않고, 국화를 헌화만 할 수 있는 장례식을 치렀다.
할아버지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도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할머니 손에 자란 나 역시도, 어린 시절에 그 교회를 다녔다. 그 목사님의 딸이 나를 소외시키는 선봉장이 되기 전까지는. 나는 그 목사님이 집회하는 교회는 다시 다니고 싶지 않았다. 교회를 가기 싫어서 일요일 아침마다 하는 디즈니 만화 프로그램도 보지 않고 늦잠을 잤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도 부러 모르는 척했다. 장례식 내내 내가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을 못 알아챘는지, 할아버지 유해를 안장하고 돌아서는 길에, 그 목사님은 나를 불러 세웠다. 너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며, 너를 위해 예배를 해주고 싶으니 교회를 꼭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에게 교회는 불안만을 조장하는 곳이었으므로, 할머니 마음의 평안을 찾아주는 곳,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국화만 가져다 둔 장례식이 오히려 손님들에게도 할아버지의 종교를 강요하는 것 같아 장례식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나는, 내게 불필요한 호의라고 거절하고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