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의 아닌강 어워드

2025년 내 인생의 기록들

by Igloo of Aningaaq

2025의 영화 - 아라비아의 로렌스

w-CK-kM4_kxP27yMw7nSOQ.jpg

언제부터 영화를 보는 게 힘들어졌을까.

나이를 먹어갈수록 차분하고 진중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쏟아지는 숏폼들과 인스턴트한 글 조각들 사이에서 횡행하다 보니, 어느새 2시간을 오롯이 하나에만 집중하며 앉아 있는 일이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과거에는 좋은 영화가 끝나감이 아쉬웠던 기억도 있는데.

작년부터 깊은 사유와 감동을 던져주는 작품들을 만나기 힘들었던 데는 아마 이렇게 변해 버린 나의 성향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유난히 오래된 영화들을 많이 선택했다.

스스로 도파민의 치유를 꾀한 측면도 있었고, 이미 검증된 명화를 선택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그것들이 내게 더 기분 좋은 영화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영화들의 낡은 색감과 분위기, 연출들은 이상하게 향수를 자극했다.

당연히 많은 영화들이 내 어린 시절보다 훨씬 더 오래된 영화들이었지만,

그럼에도 기저에 남아있는 묘한 반가움이 나를 꽤 긴 시간동안 눌러두는 데 성공하곤 했다.


그리고 12월이 되어, 마침내 나는 이 영화를 만났다.


이 젊은 이상주의자의 발버둥과 고뇌, 그리고 대부분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광활한 사막의 정경은 불혹을 앞둔 나를 여전히 두근거리게 했다. 최근 몇 년 간, 수십 편의 현대 작들을 전전하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래서 올해 내게는 이 세시간반짜리 역사극이 가장 특별한 영화로 기억된다.




2025의 책 - 이비쿠스

9791155351031.jpg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점심시간마다 홀로 회사 앞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었다.

하루는 꽤 두꺼운 그래픽 노블의 양장본 하나를 집어들었는데, 누구든 들어봤을 거장의 이름(사실 그가 아니었지만)과 강렬한 펜선의 표지가 눈을 사로잡았다.


이비쿠스의 장면들은 한 컷 한 컷이 갤러리에 전시되어도 무리가 없을 수작들이라 여느 만화책처럼 쉽사리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그래서 이 대서사를, 나는 몇 주에 걸쳐서 읽어야했다.


사실 그 즈음은 꽤나 막막한 나날이었다. 결국 학창시절부터 이어져 온 이 바닥이, 내 길이 아니라는 확신에 접어들고 점점 살아가기 보다는 버티는 것으로 변절되어 갔다. 그래서 오전과 오후의 사이에 그 짧은 호흡은 속절없이 흘러가곤 했다.


그 시간들은 생각보다 깊은 심연이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책의 주인공이 겪는 격동의 시대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네프조로프는 매번 시대의 풍랑 속에 짧게 떠올랐다가 다시금 잠기곤 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나의 안일한 삶 속 절망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마주하면 한없이 비루해지며 기가 죽곤 한다.


내 삶에선 상상할 수도 없이 휩쓸리고 부딪히고 깨지고, 그럼에도 꾸역꾸역 살아가는 이야기.

이런 식의 치유가 비록 정신학적으로 건강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나는 다시금 이런 방식으로 위안을 받았다.



2025의 유튜브 - 폭간트

.

12.JPG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채널을 하나 생각해보자.


나와 동년배면 좋겠다. 일단 소재나 대화법, 유머감각까지 내가 공감하거나 소통하기에 비슷한 요소가 많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동향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내가 가지지 못했던 인생을 가급적 대신 경험해 줘서 어떤 느낌의 삶일지도 보고 싶다. 유라시아 대륙을 바이크로 횡단한다거나, 버킷리스트 여행지였던 파키스탄의 훈자 마을에 며칠 씩 살아본다거나 하는 식으로.


물론 낯선 곳을 부유하지만 동시에 가끔은 오래 살아온 동네의 따스한 느낌을 즐길 줄 알았으면 좋겠다. 여행의 중간 중간을 익숙한 곳으로 채우는, 돌아올 곳이 있는 순례자.


바라는 게 또 있다면 마냥 오락적이기 보다는 적절한 교양도 버무려져 있으면 좋겠다. 뭐든지 가볍게, 놀면서 배우는 것들이 재밌는 법이니까.


놀랍게도 유튜브의 세상은 바다처럼 넓어서 그런 니즈를 모두 충족시켜주는 취향의 교집합 같은 유튜버가 꼭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다.




2025의 음악 - 아이엠통이 - Monster


캡처.JPG

참고로 말하지만 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는다.

굳이 정제되어 나오는 결과물을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소비자가 굳이 불필요한 감성 사연같은 게 덕지덕지 붙고, 심사위원이든 방청객이든 그들의 감상이 결과물의 순수성을 심하게 저해하는 곡을 선택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는 것이다. 결국 좋은 곡은 발화자의 사연이 아닌 관객 개개인이 가지는 푼크툼 같은 것에 좌우되는 곡이라고 생각한다만...


올해 취기가 오르면 나는 늘 이 장면, 이 노래를 들었다.

결국 위에 서술한 비판들은 전부 합리적인 기준이었을 뿐, 나의 진짜 취향을 반영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이제 서야 나도 모든 음악은 순간순간마다 각기 다른 빛을 발한다는 걸 인정하고야 만다.





2025의 아이템 - 산토리 올드 위스키

Screenshot 2025-12-31 at 17.10.35.JPG

올해도 다시금 술이다.

후쿠오카의 주류점에서 이 술을 집어들게 된 계기는 단순히 숏폼에서 마주한 마츠다 부장의 추천이었지만, 결국 세병이나 국내로 반입하게 된 계기는 여행이 끝나기 전 맛을 봤기 때문이다. 물론 훌륭한 풍미를 가진 술이었고, 위스키를 반주로 소비하는 나의 습관에 딱 맞아떨어지는 측면도 있지만 이 수상의 기반은 결국 2만원을 채우지 않은 가성비일 것이다.


올해는 평생에 걸쳐 가장 다양한 술을 마셔볼 수 있는 해였다. 증류주를 좋아한 이후로 항상 취향은 후진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과 진정성을 의심하는 마음 탓에, 아주 천천히 전진해 가자고 항상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싼 바틀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은 항상 나를 재촉했다. 남은 인생이 짧아진다고 느낄때마다, 언젠가는 도달하고픈 레이어와의 거리가 계속 조급하게 느껴졌다.


그런 일진 일퇴의 공방전 중 만난 산토리 올드 위스키는, 내게 아직은 이 정도 가격대에 좀 더 머물러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세이브 포인트 같은 술이었다.


누군가는 목적지가 아닌, 길에서 안식을 찾기도 하는 법이다.




2025의 공간 - 둔촌동의 독서실 ‘꿀공’

SE-cdfe9ee5-ca4f-45ba-90d1-1bff7d9ccf3a.jpg

회사를 그만두고 한 달간 이베리아 반도를 여행했다. 그래서 남들이 머물지 않는 소도시에 하룻밤 머무르는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항상 그런 도시는 당일치기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시간대를 제외하곤 최고의 시간을 선사하곤 한다. 이른 시간에 방문한 소꼬리찜 식당은 북적이지 않아 좋았고, 지중해의 햇살을 쪼일 수 있는 야외 테이블의 모든 풍광이 요리의 맛을 북돋았다.

론다의 밤도 아마 절대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숙소의 위치는 론다의 상징과도 같은 그 다리의 아래쪽에서부터 조망할 수 있는 절벽에 자리 잡고 있었고, 관광객이 떠난 론다의 다리는 밤이면 고요에 접어들어 와인에 취한 채로 올려다보고 있을 땐 묘한 경외감이 돋아났다.


그럼에도 올해의 공간은 둔촌동 골목길에 위치한 작은 독서실이다.


수상의 변은 단순하다. 그 곳에서 이뤄낸 성과 때문이 아니다. 올해 그 공간에서 보냈던 순간이 세월이 흐른 후에 더욱 기억에 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오롯이 무언가에 집중해서 쏟아낼 수 있었던, 아주 오랜만에 만난 내가 몹시도 반가웠다.

그러니, 이것은 공간에 대한 수상이면서 동시에 그 시간에 대한 찬사다.



2025의 인물 - 구로사와 아키라

20100603002589_0.jpg

한때는 전쟁영화를 좋아했었다.

극한의 상황에 몰린 인간상들이 부딪히고 깨지면서 나오는 감정선이 이해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조금 나이가 든 이후에는 느와르를 좋아한다.

인간 사회 전반에 대한 메타포가 묻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힘과 권력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정제되고 사회화 되어가는 과정은 결국 많은 함의를 담을 수 있다.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나는 서부극을 좋아한다.

행정이 사회가 아직 자리 잡지 않은 광활한 배경에서 펼쳐지는 인간 본연의 이야기.


그런데 놀랍게도 가장 서부극 같은 이야기를 만드는 이야기꾼이 구로사와 아키라였다. 물론 전국시대의 일본이라는 배경이 개척시대의 미국 서부와 닮아있는 이유도 있지만 일단 그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인간 본연에 대한 탐구가 흡사하기 때문이다. 결국 인류사라는 건 그리 고풍스러운 것이 아니고 인류의 본성도 그리 교양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그것을 꾸역꾸역 규격화 하고 사회화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멋진가.


앞서 올해의 영화에 대한 수상의 변에서 이미 고전영화를 사랑하게 된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큰 비중이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이었다. 그의 영화를 볼 때 나는 매번 기함 되었고 매번 여운에 젖었다.


앞서 수상한 모든 것들이 올해를 상징하듯, 살풋 취한 상태에서 마주하던 그의 영화들 또한 올해를 구성하는 기억의 단편이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금 취기가 돋아 그 장면들을 다시 찾을 때면 2025년의 시간들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