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한참 어렸을 때 아니 어쩌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막장 스토리의 막장 캐릭터를 볼 때마다 작가의 상상력에 경악을 금치 못 한 적이 많았었다.
아니, 세상에 저런 인간이 있다고?
아무리 fiction이라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회사를 다니고 세상에 내던져진지 어언 13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별의별 인간군상과 부대끼며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고 나니 드라마와 영화는 제법 미화된 것이었구나는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이야기들보다 현실이 더 허구 같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작가자체가 막장이 아닌 이상) 적어도 지어낸 이야기와 캐릭터에는 일말의 개연성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부부관계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성을 내던지고도 당당한 인간, 사적인 걸 공적인 영역으로 끌고 들어오고도 창피함을 모르는 염치없는 인간, 정말이지 상식이 단 한 톨도 없구나 하는 수준의 막말을 내뱉는 인간 등등.
훗날 내가 회사의 빌런 캐릭터를 구현해야 한다면, 머리 싸매고 상상할 수고로움은 덜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실의 존재들을 갖다 쓰기만 해도 꽤 많은 시리즈에 등장시킬 수 있는... 그야말로 노다지다. 생긴 것도 실제 삶도 공주하고는 거리가 멀기만 한데, 입사하고 나서 뼛속깊이 실감한 사실이 하나 있다. 특이하네 어쩌네 했어도 내 주변 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이었고, 내가 나름대로 곱게 자라왔다는 사실이었다.
며칠 전 아침, 한창 출근준비를 하고 있는데 메시지알람이 울렸다. 시간차 등록을 해달라는 상사의 메시지였다. 그가 그 전날 개인적으로 회사사람들과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적을 위해 외부기관과 술을 마시며 이 한 몸 다 바쳐 영업 뛰는 회사도 아니건만, 옛날부터 지들끼리 술을 먹고 다음날 갑자기 연차 쓰는 것에 기이할 정도로 관대한 문화가 있는 곳이 이 회사다. 나라고 같이 일하는 상사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무시하는 마음을 갖는 게 유쾌할 리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그가 한없이 낮아 보였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이건 메시지여서 드라이하게 답장하고 말았지만, 몇 주 전에는 참다 참다 마음의 소리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날은 지점장이 외부에 출장이 있던 날이었다.
다녀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 건물 한 회사를 들렸다가 어떤 여직원을 봤는데 최근에 본 여자들 중에 가장 예뻤다는 얘기였다. (평소에도 "여자가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들을 자주 해서 그 시대착오적이고 위험한 발언으로 조만간 골로 갈 거라는 직원들의 평가가 많은 상사다)
일단 나는 일할 때 업무와 관련 없는 말을 섞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데, 말 거는 내용도 참 가관이다 싶어 보고 있던 서류에만 시선을 꽂은 채 쓴웃음을 지었다. 청자의 반응이 이러하면 아차 싶을 만도 하건만, 당연히 거기서 멈출 눈치 따윈 없는 사람이기에 그 여자분이 연예인 누구를 닮았다느니 그 정도 미모면 회사 안 다녀도 될 것 같은데 왜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둥 계속해서 무식한 입을 놀려댔다. 내가 그래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화룡점정으로 그 회사 지점장은 너무 좋을 것 같지 않냐?(그렇게 예쁜 직원을 매일 보니까)는 회심의 질문을 날리었다.
한계에 다다른 나는 개정색을 하고 웃음기 하나 없는 대답을 쏘아 주었다.
"대체 지점장이 좋을 게 뭐가 있죠?" 그제야 지점장은 아니 뭐... 이러면서 귀가 썩을 듯한 그 발언을 멈추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올해 뽑힌 신입사원들이 지점에 인사를 왔었다. 그 직원들이 가고 나서 지점장이 또 나에게 뒷담의 시동을 부릉부릉 걸기 시작했다. 이번 신입사원 중 하나가 발령받은 지점의 지점장에 대한 얘기였다. 그 지점장은 회사 내에서 무능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로, 너나 할 것 없이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잉여 같은 존재다. 나 역시 회사를 다니며 그 지점장과 일을 해보며 겪을 대로 겪었기에 그에 관해서라면 언급하는 에너지조차 쓰고 싶지 않은 그런 상사다.
내가 같이 일하는 지점장은 유독 그 상사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격렬한 반응을 보이곤 하는데, 이번 얘기의 요지는 이거였다. 신입사원이 그 지점장 밑에서 일하게 되면 뭐를 배우겠냐는 둥, 우리 회사 지점장들은 다 그 인간 같을 줄 알 거 아니냐는 둥 내 옆에 서서 끝도 없이 열을 내었다.
지점장이 그 상사에 대한 평을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나는 매번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직원들조차 최악이라 판단하는 그런 사람을 기준 삼아 나는 쟤보다 낫잖아 자위하면 뭐가 좀 나은가? 하는 궁금증이었다. 그동안은 그냥 대충 대꾸하며 넘겼는데 최근 연달아 거슬리는 발언들에 나의 역치도 낮아질 대로 낮아졌는지 결국 나는 또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그 지점장님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상당히 어이가 없다는 듯 아니 정말 모르세요? 하는 의도를 가득 담아 말했다. 지점장이 바로 그 사람이 제일 심하잖아라고 대답했다.
"글쎄요, 제가 볼 때 다 거기서 거기예요."
지점장은 착각하지 마 너도 별다를 거 없어하는 나의 되바라진 반응에 싹수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곧 있을 근평에 앙심을 가득 담을 수도 있다. 저런 말 같지 않은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다면 나는 백번이고 또 똑같은 문장을 내뱉고 말겠지만, 굳이 내 변명을 하자면 나도 상사를 그만 무시하고 싶다고, 무뢰한 상사 밑에서 이런 소리 듣는 게 얼마나 자괴감 드는 건지 아냐고 소리치고 싶다.
그러고 보니 5월은 가정의 달이라 여기저기 돈 쓸 일이 많은데 (시집 못 간) 너는 좋겠다, 한 군데만 돈 써서라는 말도 했었구나. 노처녀 자존심에 발작하는 게 지는 거라 생각한 나는 이번엔 그냥 넘겼는데, 다음에 또 이렇게 나오면 나도 내 입에 어떤 칼을 물게 될지 모르겠다.
미셸 오바마는 "상대가 저급하게 나오더라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When they go low, we go high)."라는 멋진 말을 남기셨는데, 대한민국 소재 어떤 회사의 리얼리티에서 실천하기에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