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은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수차례 되새김질을 해도 회사만 가면 늘 감정 상하는 일이 벌어진다. 직장인이 감히 직장에서 사사로운 감정 운운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일까.
안 그래도 타인은 지옥인데, 이해관계가 얽힌 곳에서의 타인은 지옥 중에서도 그 레벨이 높다.
착한 사람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마는 회사에서만큼은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그나마 지옥에서 멀어진다. 사실 난 일이 완벽하면 그 사람의 인성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데까지 관심이 뻗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 자주 드는 의문이 있다. 왜 일도 못하는 인간들이 그 와중에 싸가지까지 없지?
나도 누군가의 끔찍한 지옥이야 라고 주제 파악을 해봐도 머리와 입으로 상스러운 표현들이 쉴 새 없이 출몰한다. 겉으로 내뱉을 수 없으니 분노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급한 불을 끄려고 캐리어를 쌌다. 주말을 이용한 2박 3일의 짧은 일정, 혼자 급작스럽게 떠나 사진 찍힐 일도 없는 상황이라 캐리어가 반도 안 찼다.
5년 만에 다시 찾은 타이완.
타이베이는 세 번씩이나 갔으니 이번에는 대만의 중간에 위치한 타이중으로 날아갔다.
대만은 여전히 현금사용 비율이 높다는 말에 짐을 찾기 전 미리 알아둔 ATM기에서 환전을 시도했다. 해외에서 ATM기 환전을 처음해 보는 거라 몇 번의 실패가 있었는데, 나중에서야 내가 트래블체크카드를 넣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비행기로 도착한 승객들 중 사실상 마지막으로 짐을 찾아 럭키드로우 추첨에 참여했다. 대만 재 방문객으로서 한 개도 아닌 두 개의 큐알코드를 받았는데 결과는 모두 꽝이었다. 벌써 네 번째 방문이건만 사람 참 못 알아보는 시스템일세 실망을 금치 못했다.
공항버스를 타기 전 한국서 사둔 e-sim을 활성화시키려는데 이 또한 실패를 거듭했다.
(처음 해보는 거기도 했지만) 여권을 스캔하고 실명확인 등록을 해야 하는 게 찝찝해서 안 하려고 발버둥 친 것이 화근이었다. 시키는 대로 하고 나니 데이터가 빵빵 터지었다.
대만에서 쓸 수 있는 돈과 데이터가 수중에 들어오고 나서야 모든 것에 안심이 되었다. 나는 정녕 자본주의에 절어있는 현대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information center로 가서 호텔로 가는 교통편을 물어봤다. 대만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대만 사람들은 몹시 친절하다. 서로 서툴지언정 (북유럽에서 들리지 않았던) 영어가 다 들리는 마법 같은 순간. 이건 완전 헌 하오, 정서적 친밀감이 소용돌이친다. 그녀가 준 종이에 내가 내려야 할 정거장, 버스요금이 적혀있다. 부적처럼 소중히 챙겨 들고 그녀가 알려준 편의점에서 원래 갖고 있던 이지카드를 충전한다. 편의점 직원이 충전 전 잔액을 알려줬는데 저번 여행에서 남긴 돈이 꽤 있어 공돈을 번 기분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슈로 공항에서 시간 낭비를 한 탓에 버스를 탔을 땐 이미 해가진 시커먼 밤이었다. 말이 공항버스지 시내버스와 다름없는 버스여서 승객들이 무척 많았다. 목적지까지 가는 중간에 한 대학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어린 학생들이 특히 많았다. 한 여학생이 내 옆에 서서 나도 안 본 K-드라마 엄마친구아들을 시청하고 있다. 실제로 타이중의 번화한 거리를 걸을 때마다 한국 아이돌들의 노래가 꽤 자주 들려 한류가 맞구나 생각했다. 호텔에서 본 대만 방송에서도 한국 아이돌이 출연하는 걸 봤는데 심사자 중에는 쿵따리 샤바라 구준엽이 있었다.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짐을 대충 던져둔 다음 바로 펑지아 야시장으로 향했다. 혼자 간 여행이라 식욕은 별로 없었지만 대만까지 가서 야시장을 찍지 않는 건 서울에 온 외국인 관광객이 광장시장에 안 가는 것과 다름없다. 유명한 야시장답게 펑지아 야시장은 대만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어차피 한자를 잘 못 읽으니 사전조사 없이 눈치껏 사람들이 줄 서있는 가게에서 고구마볼 한 봉지를 샀다. 다들 손에 무언가를 들고 먹는 분위기라 그 분위기에 녹아들어 열심히 먹으며 시장 구경을 했다. 고구마볼은 많이 달지 않아 계속 손이 가는 간식이었다. 한참 먹다 보니 목이 말라 쩐주나이차를 사서 마실까 하다가 손질된 과일을 파는 가게에서 리엔우 한 봉지를 샀다. 영어로 왁스 애플로 불리는 대만 과일 리엔우는 우리의 사과 같은 식감이 있는데 사과보다 수분이 더 많았다. 다만 소금을 살짝 뿌려먹는 것이 방식인 건지 먹을 때마다 끝맛에 짭조름함이 느껴져 묘했다.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시장 구경을 하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격식 따위 필요 없이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친근한 분위기, 시장특유의 활기와 생기 넘침이 어우러져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파는 상인분들이나, 다른 데서 번 돈으로 먹고 사기 위해 방문한 손님들을 보면 복잡했던 머릿 속도 단순해진다. 이 세상에 던져진 이상 그 누구도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각자의 위치에서 저마다 고군분투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시장이기 때문이다.
시장 방문 한 번으로 내 현실의 지옥이 갑자기 천국으로 바뀌는 일은 절대 없다. 다만 세상 사람 대부분이 먹고살려고 애쓰고 있는 가운데 내가 있는 곳이 지옥 입네 하는 유독 심한 유난과 엄살은 자중하라는 셀프 경고가 먹히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