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를 옮기고 지금의 업무를 한 지 어느덧 반년이 흘렀다. 긍정의 회로를 돌려 최대한 좋은 점만 보려고 애쓰면서 어찌어찌 팀을 이끌고 지나왔지만, 경력이 미천한 팀원들로 구성된 팀의 중간 결재자 자리는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몇 주전에는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결재를 하다가 오류 투성의 보고서들을 보고 화가 솟구쳤다.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결재자가 무엇을 선호하고 무엇에 발작을 일으키는지 사리분별을 하고도 남을 세월 아닌가? 단순 오탈자가 난무하고 최소한의 팩트체크도 안 한 마구잡이식 서술을 읽고 앉아있는 내 역할에 허무함도 함께 밀려왔다.
일정 부분의 결정을 내리고 확인해 주는 자리가 내 자리가 맞지만, 이렇게도 자잘하고 하찮은 걸 매번 지적하게 하는 팀원들이 꼴 보기 싫었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 어설픈 비유가 될지 모르겠다...) 조직생활을 하면 할수록 군대의 상병(?) 정도 되는 대리의 짬바와 존재감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지 매년 깨닫는다. 지금은 옛날과 달라져서 중간 결재자들도 "결재하는 대리"로서 실무에서 벗어날 수 없으나, 부서의 분위기와 실적은 (실무자 중에서 가장 무르익은) 대리의 역량에 큰 영향을 받는다. 나는 비교적 후배 복(!)이 있는 축에 속했어서 실무자들을 멱살 잡고 하드캐리해주는 대리의 귀함을 이번 팀에 와서 느꼈다.
우리 팀에도 대리가 딱 한 명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재할 때마다 나의 분노버튼을 자주 누르는 자도 그고, 가장 미덥지 못한 자도 그다. 애는 착하고 성실하나 대리 맞나 할 정도로 눈치가 부족하고, 일의 결과물에서 거의 매번 기대를 저버린다. 저번 주는 그 대리가 휴가를 앞두고 들뜬 건지 지적과 수정 릴레이를 하게 만들어서 작정하고 쓴소리를 했다. 동생들 앞에서 혼나는 형아의 기분이 어떤 건지 그 누구보다 잘 알지만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대리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 컸다.
개인의 능력차는 차치하고 본인의 도장이 쾅 찍힌 보고서를 나는 이렇게 막 올려요 던지는 그 심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나의 올챙이 시절을 자백하자면 코앞에 떨어진 일들이 많을 때 저 인간이 고쳐주겠지, 당신도 월급값 해야지 하면서 보고했던 적이 더러 있긴 했다. 그래도 그건 까다로운 건이었고 단순 오류를 방지하기 위한 검토는 늘 깔려있었다.
가정도 아니고 학교도 아닌 회사에서 이러한 상식 (common sense)의 영역을 건드려야 할 때 몹시 피로하다. 이곳은 회사니까 부모와 선생님이 아닌 중간 결재자의 역할을 하고 싶다.
결재가 올라온다.
최소한의 성의표시는 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