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콘텐츠
작금의 시대는 그야말로 콘텐츠 전성시대다. 무엇을 보고 읽어야 할지 그 선택이 버거울 정도로 콘텐츠가 넘쳐난다. 지금처럼 콘텐츠의 다양성이 폭발하기 이전부터 나는 콘텐츠 소비자보다 콘텐츠 생산자가 되고 싶었다.
직장에 대한 염증과 직장인의 한계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때면 괴로움의 근원은 늘 한 곳으로 수렴되었다. 회사에는 오롯이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업무에는 '내 이름'을 붙일만한 어엿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저질체력을 핑계 삼은 불성실한 현실로 콘텐츠 생산자라는 이상으로부터 하루하루 멀어져 가고 있던 어느 날. 업무적으로 문의할 게 있어서 다른 부서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우리 회사에는 직원의 생일 때 책을 선물해 주는 복지가 있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 마침 그 복지의 담당자가 생일 맞은 직원들이 고른 책들을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다. 옆에서 힐끗 쳐다보니 내가 읽고 싶었던 책들도 있었고, 강렬하고 인상적인 제목을 가진 책들도 있었다. 인간적인 호기심이 솟구쳐 그중 몇 권은 책의 주인이 누구인지 담당자에게 물어보았다. 친하게 지내는 직원들 중 겨울 생들이 많아서 유독 더 궁금하기도 했다. 두 세권 정도 책의 제목과 책의 주인을 매치해 보았는데, 놀라울 정도로 책의 제목과 책을 고른 직원의 이미지가 맞아떨어졌다. 한 프랑스 미식가는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했다는데 어떤 콘텐츠를 소비하는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 무척 흥미로웠다. 재테크에 대한 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직원이 고른 책에는 제목부터 돈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었고, 평소 구사하는 워딩이 범상치 않은 직원이 고른 책은 제목에서부터 확고한 주관이 느껴졌다.
아웃풋을 내는 콘텐츠의 생산자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인풋하는 콘텐츠의 소비자가 돼야 하기 때문에 심기일전의 마음으로 도서관에서 다양한 장르의 책을 잔뜩 빌려왔다. 한 책을 골라 몇 장을 읽어 내려가는데, 책갈피로 추정되는 것이 꽂혀 있었다. 공공도서관의 공용 도서에 밑줄을 긋거나 페이지를 접는 등 모든 종류의 영역표시를 혐오하는 시민으로서 짜증이 밀려와 발견하자마자 그 책갈피를 낚아채었다. 뒤집어보니 그걸 끼워놓은 자가 일부러 그 부분만 오려낸 듯, 한 구절이 적혀있었다.
아름다웠다. 살아 있었으니까.
ㅡ임솔아, 초파리 돌보기
내가 이미 읽었던 소설임에도 낯설었다. 비록 그 시절의 나는 이 문장에 밑줄 그을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이런 문장을 기억하려던 자의 영역표시라 나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졌다.
이런 문장을 성실하게 소비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런 문장을 생산할 날도 오겠지.
오늘도 야무진 꿈을 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