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낯선 동네로 굴러들어온 돌맹이 하나.
#고향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고향은 뭘까. 고향이라 하면 왠지 해가 지면 밥냄새가 집마다 피어오르고 누렁이 흰둥이가 맞이해주는 그런 전원 풍경이 그려진다. 도시 사람들에게 세뇌된 고향이라는 이미지의 한 장면이다.
나는 1986년 이른 오전 길동의 오세기 산부인과에서 태어나서 1986년에 완공된 고덕주공6단지 아파트에서 약 30년을 살았다. 고덕주공아파트는 1970년대 강남 개발로 인한 인구 유입과 주거난을 해소하기 위한 베드타운으로서 주택공사가 주도한 대규모 주거단지이다. 5호선 고덕역부터 상일동역까지 이어지는 땅에 1~7단지 까지 있었고(8단지는 상록아파트라고 불려 고덕주공1~7단지와는 결을 달리했다.) 우리 가족은 그 중 6단지에 터를 잡아 처음에는 602동 503호에, 1996년부터는 624동 504호에 살았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짜리 주공아파트의 꼭대기 층에서는 장마철이면 천장으로 물이 샜고 한겨울이면 노후된 시설로 인해 난방을 해도 방바닥은 병아리 눈꼽만큼만 따뜻해졌다.
오래된 단지인 만큼 내가 태어날 당시에는 묘목이었을 나무도 세월이 지나 울창하게 숲을 이뤘다. 관리되지 않은 나무와 풀이 더 정감있는 아파트 단지의 정원을 만들었다. 봄이면 6단지부터 3단지까지 이어지는 길에 심어진, 아이 세 명이 껴안아야 겨우 그 둘레를 감쌀 수 있을 만큼 두꺼운 왕벚나무가 여의도 윤중로를 부럽지 않게 했고, 여름이면 길 양 옆의 플라타너스가 무성하게 자라 터널을 만들었다. 가을이면 고덕천 앞의 은행나무가 일렬로 노랗게 물들었으며 겨울엔 화단 곳곳에 크고 작은 눈사람이 생겨나곤 했다.
태어나서부터 약 30년을 한 동네에서 살았으니 고향이라 불러 마땅할 강동구 상일동 주공아파트 6단지는 사라지고 지금은 고덕 자이라는 브랜드 아파트로 재건축 중이다. 전도사 아저씨를 피해 다니던 모래바닥 놀이터도, 한여름 터널을 만들어주던 플라타너스 나무도, 등교 전 준비물을 사려고 들르던 피노키오 문방구도, 사회체육센터에서 자유수영을 끝내고 친구들과 꼬깃한 지폐를 모아 즉석떡볶이를 먹던 상아분식도, 해마다 봄이 오길 기대하게 만들었던 수백 그루의 커다란 벚꽃나무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예전 고덕 주공 아파트의 정원에 빼곡하던 나무처럼 높고 곧은 신축 아파트가 다닥다닥 들어섰다.
유년기를 보낸 아파트가 철거되는 현장을 보고 눈물 흘리며 돌아왔다던 어떤 소설의 한 구절이 생각나면서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고향은 더이상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덕주공아파트의 철거가 시작 될 무렵, 옆 동네 둔촌주공아파트에서 한 사람의 기록이 시작되었다. 그 기록의 여정을 보며 고향을 기록하지 못 한 나를 탓하기도 했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사라진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기록되지 않은 공간은 그 공간을 기억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이 세상에서 영영 자취를 감춘다.
#굴러들어온 돌맹이 하나
도쿄에서 서울로 돌아와서 얻은 첫 번째 집은 서대문구 홍제동 끝자락에 있는 아파트 한 켠이었다. 집에서 나와 남 쪽으로 몇 보만 더 걸으면 행정구가 종로구로 바뀌는, 서대문구 홍제동의 경계에 위치한 곳이다.
홍제동으로 이사오기 전에는 홍제동이 행정상 서대문구에 속한 동인줄도 몰랐다. 서울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만 살아봤던 나로서는 서북쪽 끝=은평구였다. 지금도 홍제동을 은평구로 착각하는 지인이 많다. 그만큼 이곳에 살 거란 생각조차 안 해본, 심리적 거리가 머나먼 곳이었다.
2020년의 여름, 그런 동네에 어쩌다가 굴러들어왔다. 이름만 들어본 홍제동은 생각보다 근사한 곳이었다. 아케이드형 재래시장인 인왕시장이 있고, 인왕시장 옆에는 1970년에 지어진 유진상가와 유진맨션이 있다. 그 앞으로 난 대로에는 쉴 새없이 버스가 다니고 인도 양 옆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직접 농사지은 농산물을 소쿠리에 담아 팔고있었다.
땡볕의 더위를 큰 우산으로 피하며 길 모퉁이에 앉아 고구마줄기를 다듬는 노인이 있었다. 그 앞에는 빨강 노랑 여름 과일을 쌓아올린 노점 과일상이 있었다. 그 옆으로 빠진 길 끝에는 평상에 둘러 앉아 무언가를 함께 먹는 중장년의 남녀가 있었다. 인왕시장 청과물 상점에서는 꽈리고추 천 원 어치를 살 수 있었고, 꾸릿한 냄새가 나는 생선 가게 앞에는 귀모퉁이가 잘린 고양이 몇 마리가 느긋하게 앉아있었다. 한동안 잊고 살던 풍경이 눈앞에 현재 시제로 펼쳐졌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고향이 여기, 홍제동에 있었다.
굴러들어온 이 동네가 꽤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한국적'인 동네에 살 수 있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무더위가 가신 밤에는 집을 나와 동네와 친해지기 위해 붉은 벽돌의 나지막한 주택 사이를 이리 저리 걸었다.
홍제동은 '맨숀'이라 이름 붙은 60년대 건물부터 한창 공사중인 21세기 건물까지, 한국의 아파트 변천사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지역이다. 홍제라는 지역명 부터 조선시대 중국 사신들이 묵었던 국영 여관인 <홍제원>에서 따왔으니 인간이 서식하는 건물에 관한 역사가 깊은 곳이다. 홍제원 터에는 홍제원 힐스테이트라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있고, 그 앞에 옛날 옛적 이곳이 홍제원이었다는 비석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 일대는 또다시 재개발 정비구역 대상지로 추진되어 몇 년 안에 지금의 모습은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
재개발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지금의 홍제동은 기록해둘 수 있다. 사라질 운명에 처한 건물과 삶을 이대로 흘려보내기 아쉽다면, 낮은 담장의 다세대 주택과 붉은 벽돌의 맨숀을 기억해주길 바란다면 어떤 형태로든 기록해야했다. 그게 굴러들어온 돌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록되지 않은 공간은 기억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자취를 감추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