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초 이야기(21)
아침부터 홍수가 난 줄 알았어요. 배가 터지도록 또 주고 또 주네요. 심오가 오늘 목이 마른 걸까요… 왜 나는 이런 고문을 당해야 하는 걸까요? 시작은 있었는데 끝이 보이질 않네요.
“내일 아침엔 물을 못 마시니까 조금만 더 마셔…”
…이게 무슨 말일까요? 내일 물을 못 마신다니! 갑자기 잎사귀가 바싹 마르는 것 같고 몸이 휘청거렸어요. 뭐죠, 이 불길한 예감은. 이렇게 더운 날, 물도 없이 버티라니요. 내일 비 소식이 있던데, 그럼 밖에 내놓으면 될 텐데....
“나, 내일 여행 가. 집에 아무도 없어.”
여행.
내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단어 중 하나예요. 사람들은 여행이란 말을 들으면 얼굴에 환하게 빛이 돌지만, 집 안에 사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에요. 예전엔 모두가 여행만 하면 초비상이었는데, 로즈마리만은 흔들림이 없었어요. 물을 많이 먹지 않아도 되는 애들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죠. 어디 사막 같은 데서 온 애들은 며칠씩 물을 안 마셔도 괜찮다던데, 아직도 믿기는 어려워요. 그래도 모레 점심까지만 잘 버티면 된다니 그나마 다행이에요. 물론 그렇다고 이렇게 물폭탄을 퍼붓는 건 좀… 뭐, 성의를 생각해서 조금 더 머금어둘래요. 목마르면 나만 손해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요? 뭔가 새로운 걸 찾고 싶어서일까요? 아니면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일까요? 예전엔 새로운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더 컸던 것 같은데, 요즘은 점점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사람들의 눈빛만 봐도 느낄 수 있거든요.
나도 가끔은 이 갑갑한 화분을 벗어나 자유로운 나비처럼 날고 싶다는 상상을 해요. 탈출하고 싶은 마음과 호기심이 겹치는 순간,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여기에 ‘지금이 아니면 안 돼’ 하는 절박함이 마음속에 한 방울 떨어지면, 사람들은 곧장 짐을 챙기죠.
사실 나는 자유롭지 않아서 여행이란 걸 온전히 이해하긴 어려워요. 전에 꿀벌 아저씨가 왔을 때 좀 더 물어볼 걸 그랬어요. 괜히 딴 얘기만 하다 보내버린 게 지금도 아쉬워요.
아저씨는 ‘여행’이라는 말 대신 항상 ‘모험’이라고 했어요. 아저씨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예전에 여행기를 써서 아주 유명해졌다고 했거든요. 독일에 살던 마야라는 분이셨는데… 자유롭게 여행하며 수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말벌들의 공격으로부터 벌집을 지켜낸 용기 있고 지혜로운 분이라, 가문의 영웅이었대요. 아저씨도 그 피를 물려받아 매일 새로움을 발견하며 산다고 했어요.
“모험은 늘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 주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어요. 아저씨 얘기를 듣고 있자면, 여행… 아니, 모험이라는 게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 것인지 절로 느껴졌어요.
나는 풍선을 달면 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할 때가 있어요. 다른 풍선들은 훌쩍 날아가는데, 나는 늘 그 자리에 있거든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행이 꼭 자리를 옮기는 일만은 아닐지도 몰라요.
매일이 똑같아 보여도 자세히 보면 똑같은 하루는 없어요. 물빛이 미묘하게 다르고, 바람의 방향도 조금씩 바뀌고, 어쩌다 공벌레 하나가 남긴 발자국에도 마음이 동할 때가 있어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발이 그 발이겠지만, 매일 발자국 모양이 달라요.
또 엊그제는 짙은 안개가 끼던 날, 이름 모를 벌레 한 마리가 내 화분 가장자리에 뒷모습을 보이며 고독한 방랑자처럼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그 순간 안갯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또 내 위에 맺힌 물방울 하나가 세상을 거꾸로 비추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때, 나는 움직이지 않아도 어딘가를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순간순간 새로움을 발견하는 일,
어쩌면 이것도 여행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 새로움은 아무한테나 보이지는 않아요. 참 신기하게도, 똑같은 바람, 똑같은 햇살 속에서도 어떤 날은 모든 게 반짝이고, 어떤 날은 전부 먼지처럼 뿌옇거든요. 그 차이는 어쩌면 ‘마음’에 있는지도 몰라요. 마음이 삐딱하면 햇살도 삐딱하게 느껴지잖아요. (경험담이에요.)
무뎌진 마음에는 아름다움이 찾아오지 않아요.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세상도 늘 같은 모습으로만 반복될 뿐이에요. 갑자기 예전에 햇볕이 곱게 드는 담벼락에 살던 맨드라미가 한 말이 떠올라요. “뭐, 햇빛이 다 똑같은 햇빛이지.” 감수성을 어디에 다 쏟아버린 건지...
그래서 진짜 여행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요?
멀리 떠나지 않아도, 매일 같은 곳에 있어도, 마음을 새로이 하면 익숙한 것들 속에서도 낯선 빛깔이 보여요. 게다가 그 낯섦은 나를 늘 깨어 있게 만들어요. 새로운 걸 본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숨이 멈추면 아무것도 새롭게 보지 못하잖아요. 새로움도 낯섦도 느껴지지 않을 때, 그건 어쩌면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는 신호인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매일을 새롭게 살아내는 일, 변화를 알아차리고 감탄하는 일, 그게 곧 생명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뿌리를 박고 있어도, 마음이 움직이면 세상은 달라 보여요. 움직이는 마음, 살아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 그게 어쩌면 가장 깊고 진한 여행일지도 몰라요.
그래도 역시 나를 챙겨주는 건 심오뿐이에요. 여행 전날이면 물을 콸콸 퍼붓거든요. 그 시원한 마음 하나가 오늘도 내 마음을 조금은 새롭게 해요. 여행이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꿀꺽꿀꺽, 여기저기서 물 먹느라 난리예요. 물을 조금만 많이 줘도 투덜거리던 로즈마리도 목구멍까지 들이붓고 있어요. 여행이 떠나는 사람에게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었어요. 주변에서도 이렇게 난리니까요.
어쩌면 매일 새로움을 찾으려는 건, 더 잘 살아내려는 삶의 의지일지도 몰라요.
혹시 모르죠. 내일 아침, 나는 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내가 되어 있을지도요.
물론 여전히 날 수는 없고, 다른 곳으로 가지는 못하겠지만요.
그래도 마음만은 오늘보다 조금 더 가볍게 떠오를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