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치표 어딘가에

적성과 꿈에 맞는 진로 지도

by 이동수

대학 입학시험을 마치고 집에 오니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엄마가 잘 봤냐고 연신 물었다. 내 나름으론 이미 포기한 영어를 제외하곤 잘 본 것 같아 “그렇지 뭐”하고 시크하게 듯 대답했다. 나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채점했냐, 몇 점 맞았느냐고 속사포로 물으셨다. 좀 기다려 보라고 짐짓 여유 있는 척했지만 나 역시 내 점수가 너무 궁금했다. 잘 봤다는 느낌이 아니라 잘 본 걸 확인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집으로 들어오며 사 온 정답지와 문제지를 마룻바닥에 펴고 1교시 과목부터 채점을 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엄마를 위해, 아니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맞은 문제엔 빨간색 펜으로 큰 원을 그리는 내 손은 거칠 게 없었다. 특히 2교시 나나 엄마가 가장 걱정했던 수학을 채점할 땐 빨간 원은 더 커졌다.


그러나 그 신나는 분위기는 영어를 채점하는 순간 바뀌고 말았다. 1번부터 10번까지 전부 X였고, 엄마와 내가 그토록 바라던 빨간 원은 13번이 돼서야 볼 수 있었다. X가 그어질 때마다 엄마의 꺼질 듯한 한숨 소리는 커져만 갔다. 나 역시 아무리 영어를 포기했지만 그래도 반타작은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결과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참담했다. 난 채점을 멈추고 내 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과목에서 나름대로 선전을 했지만, 영어에서 상상 이상으로 폭삭 망한 결과 내 성적은 평소 모의고사보다 적게 나왔다. 목표로 하는 과에 들어가기엔 간당간당한 성적이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소신 지원을 하자니 떨어질 것 같고 재수할 형편도 되지 않았지만, 설령 한다고 해도 좋아질 것 같지도 않았다.


성적이 잘 나온 아이는 잘 나온 아이 대로 못 나온 아이는 아이 대로 하나둘 진로를 결정했다. 하지만 난 원서 작성을 위해 담임 선생님과 상담하는 날까지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서는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라고만 하실 뿐이었다. 그래 선생님과 상의하자고 생각하고 성적별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선생님에게 갔다. 선생님은 ○○학원에서 발행한 점수에 따른 배치표를 들고 말씀하셨다.


“어디 갈지 정했니?”

“아뇨, ○○대 ○○교육과에 가고 싶은데….”

“가만있어 보자, 네 성적이 애매한데….”

“그래서요 선생님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어요.”

“사흘 후 마감인데 아직도 결정을 못 했다니 어쩌려고 그래? ○○교육과에 가고 싶으면 막판까지 눈치를 보든지, 아니면 이 표 줄 테니까 네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데 중에서 어딜 갈 건지 부모님과 상의해서 내일모레까진 정해와.”


선생님에게 도움을 얻으려는 내 생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선생님이 주신 배치표는 사실 필요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난 이미 그 배치표를 수없이 봐서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이 어디고 어느 과를 갈 수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소득 없는 상담을 마치고 집에 가니 형이 선생님이 뭐라고 하더냐고 물었다. 난 배치표를 주면서 선생님이 했던 말을 해주었다. 그러자 형은 “○○교육과는 내가 봐도 위험하고 떨어지면 너도 알다시피 재수할 집안 형편이 아니잖니? 그러니 이 표에서 네 성적에 맞고 그나마 네가 가고 싶은 곳을 정하자.”라고 말했다. 난 두말없이 형의 의견대로 했다. 내 주장을 말하기엔 솔직히 내가 ○○교육과를 꼭 가고 싶은지 확신할 수 없었고, 그래도 대학물은 먹어보고 싶기도 했다. 몇 번의 흥정(?) 끝에 결국 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원서를 넣기로 했고,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그 결정대로 살고 있다. 정말 운 좋게도 그리 나쁜 결정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엔 그때 ○○교육과를 갔으면 어땠을까? 끝까지 눈치작전을 해서 원서를 넣었다면 합격했을 텐데…. 하는 미련이 남아있다. 만약 그랬다면 난 아마도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과 꿈도 모르고 성적에 맞춰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지금도 크게 달라진 그것 같지는 않다. 학교에서 하는 진로 지도 역시 다변화된 사회,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대학 입학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처럼 자신의 진로에 관한 공부 그리고 그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이뤄졌으면 한다. 그래서 나처럼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갖는 학생들이 조금은 줄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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