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처럼은... 어느새 닮아가기
이름 없는 존재로 국민학교 시절을 보낸 후 사는 동네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배정되어 중학교를 가게 되었다. 그 당시 막내아들의 중학교 입학식은 하루 일당이 소중한 공사판 목수 일을 하시는 아버지와 가족 같이 대우는 하지 않으면서도 공장 이름은 “다남매”였던 봉제 공장을 다니시면서 실밥 제거하는 일을 하셨던 어머니도 반드시 참석해야만 하는 집의 큰 행사였고 중요한 일이었다.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옆에 세우고 엄청 큰 교복을 입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으로 찍은 입학 사진 속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각각 국민학교와 중학교로만 학교생활을 끝내야만 한 나의 두 누나의 슬픔을 알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던 것 같아 부끄럽고 누나들에게 미안하다.
친구들과 다른 중학교에 배정된 나는 조용히 학교에 다니는 아이였다. 아마도 빡빡 깎은 머리에 버짐이 핀 50여 명의 아이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루는 담임선생님께서 학교 마치고 당신의 짐을 옮길 사람을 몇 명 정하셨다. 왜 내가 거기에 포함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비만이라 힘이 셀 것 같은 착각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 당시 나는 숨소리에 김치 냄새가 날만큼 영양이 부실한 삐쩍 마른 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난 선생님의 명령에 따라 선생님의 짐들을 열심히 날랐고 일을 마친 후 선생님은 우리에게 짜장면을 시켜 주셨다. 입학식 때도 못 먹어본 짜장면을 선생님이 사주신 것이었다. 난 그런 선생님이 너무 멋있어 보였고 고마웠다. 그 후 나를 예쁘게 보셨는지 그 이후 선생님은 나에게 중책을 맡기셨다. 바로 반에서 떠드는 아이를 적으라는 임무였다. 반장이나 모범생이 하던 일을 나에게 맡겨주신 것에 난 너무 고맙고 날 인정해 주신 선생님을 위해 그 거룩한 임무를 절대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완장을 찬 나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수업시간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까지 아이들을 감시하고 아이들의 잘못을 선생님에게 일러바쳤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특히 선생님의 담당 과목이었던 기술산업은 정말 열심히 했다. 월말고사, 중간고사, 실력 고사 등 각종 시험에서 난 최소한 기술산업은 반에서 제일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그런 나를 선생님은 더 자주 부르셔서 일을 맡기곤 하셨다. 소심하고 어디 있는지 모르던 아이의 완장질은 시험 성적이 나온 직후 절정에 이르렀다. 성적이 나오면 선생님은 90점 이상 맞은 아이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시고 칭찬을 해주셨다.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셨다. 그리고는 60점 미만을 맞은 학생을 불러낸 후 온갖 욕을 하셨다. 나는 대역죄인처럼 다뤄지는 그 아이들을 선생님과 같은 시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교만한 나도, 정말 싹아지 없던 나도 예측 못한 명령이 선생님의 입에서 나왔다.
“야, 90점 이상 맞은 사람들은 이 놈들을 4점 당 한 대씩 빰을 때려라.”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6-점에서 저 놈이 맞은 점수를 빼서 그것을 한 문항 당 점수인 4로 나누면 저놈이 틀린 숫자가 나오는데 그만큼 그 아이를, 내 친구를 때리라는 것이었다. 시험을 잘 본 사람부터 한 대씩 때리라는 것이었다. 선생님 말씀대로면 시험을 내가 제일 잘 보았으므로 나는 60점 미만의 학생들 모두를 한 대 이상씩 때리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막 나가는 아이였어도 이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선생님의 농담이겠거니 하고 그저 웃고만 있는데 선생님은 빨리 때리라고 하셨다. 때릴 아니나 맞을 아이 모두 엉거주춤 있자 선생님은 시범을 보인다고 52점 맞은 아이의 빰을 한 대 갈기셨고 당신처럼 하라고 그 큰 눈을 부릅뜨고 재촉하셨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차마 못 때리는 나를 선생님은 “그럼, 네가 대신 맞아.”하고 내 빰을 때리셨다. 눈에선 불이 났고 무서웠다. 더 맞기 싫었다. 저 놈이 시험을 못 본 것이 미웠다. 선생님의 재촉이 또 날라 왔다. 또 맞을까 봐 난 아이의 빰을 툭 쳤다. 이젠 됐겠거니 했는 데 선생님이 내 뺨을 또 때렸다. 선생님 말을 장난으로 알았단다. 제대로 저 놈이 반성할 수 있게 때리란다. 난 또 맞을 것 같아 한 아이의 빰을 세게 갈겼다. “짝!” 교실을 가득 채운 그 소리가 익숙해질 때쯤 내 괴로움도 점점 옅어져 갔다. 그런데 이 상황을 보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정말 즐겁게 웃고 있었다. 선생님의 과장된 행동과 말이 구경꾼들에게는 너무 재미있고 웃긴 것이었다. 고통 속 현장에 있는 친구들을 보며 나만 아니면 된다는 안도감과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둔감함을 어쩌면 그때 배웠는지 모르겠다. 때린 4~5명의 아이나 친구들에게 맞은 10여 명의 아이들 모두 선생님의 코미디 속 비극 배우일 뿐이었지만 그 시절 나와 내 친구들은 선생님은 성스러운 존재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와 내 친구들이, 아니 적어도 내가 선생님의 성스러움을 부정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학기가 끝나갈 즈음 난 왜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56점을 받은 적이 있었다. 즉 내가 한 대를 맞아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자기가 때리겠다고 달려들었다. 그들의 대부분이 나에게 맞은 적이 있었던 아이들이었다. 난 맞는 두려움보다는 내가 게으르고 불성실한 사람이 된 것이 너무 부끄러워 빨리 맞고 들어가고 싶었다. 치열한 경쟁 끝에 한 아이가 결정됐고 그 아이는 정말 있는 힘껏 내 뺨을 때렸다. 순간 선생님의 웃는 모습과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일그러진 그림처럼 내 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나를 때린 아이의 통쾌함과 경쟁에 밀려 나를 정당하게(?) 때리지 못이 시험을 잘 본 아이들의 아쉬움이 몸으로 전해졌다. 통증이 가시고도 한참 동안 그 얼굴의 웃음들은 잊히지 않았다. 뺨의 고통보다 그전에 느껴보지 못한 감정은 내 평생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그 이후 선생님을 볼 때마다 그 웃음이 떠올랐고 난 선생님을 피했다. 그리고 “내가 선생님이 돼서 당신처럼 하지 않아도 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어쩌면 그것이 내 꿈의 시작이었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받은 긍정적인 영향이 아이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만 내 경우를 보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