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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SE리제 Jun 11. 2022

미루는 사람

뭐든지 미뤄놓고 보는 사람. 

시작하는 게 어렵고 힘들게만 느껴지는 사람. 미루는 게 습관이 된 사람. 미뤄놓고 금세 까맣게 잊어버리는 사람. 그리고 이 과정을 반복하는 사람.


이 사람의 미루기는 매번 후회와 자책으로 끝난다. 마음을 다잡아 보아도 시작은 언제나 어렵다. 쉽게 숨어버리고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가져다 대고. 게으른 완벽주의의 성향도 있다. 말이 좋아 완벽주의지 따져보면 처음부터 다 잘하고 싶은 도둑놈 심보에 더 가깝다. 처음 시작하는 거면 누구라도 어색하고 잘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시작하기도 전에 자기가 뭐라도 된 양 완벽하게 잘 해내야만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현실을 마주하고 직면하는 건 곧 왜곡된 자아에 대한 도전이다. 이 사람은 볼품없는 진짜 모습을 마주하기 두렵다. 아니, 사실은 미루고 있는 자신에 대한 실망은 그렇게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태껏 미루지 않았다면 위대한 것을 이뤄냈을 거라는 확신. 진짜 고통스러운 쪽은 이쪽이다. 자아는 이미 한껏 비대해졌으므로 허풍을 걷어낼 줄 모른다. 이 사람은 스스로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불쌍한 나.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건 실망도 자책도 아니다. 자기 연민이다.


왜곡된 자아상은 현실과 이상 사이를 더 멀게 만들어 결국은 손도 하나 까딱하지 않도록 만든다. 가시적인 성과도 실패도 없어 볼록거울같은 자아는 더욱 공고해진다. 반복된다.


누구라도 처음엔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일수록 차차 나아지는 법이다. 이 사람은 그런 사실을 '아는 것'과는 별개로 차차 나아지리라는 '믿음'이 전혀 없다. 당연하다. 미루느라 성과를 얻어본 적이 없기에 경험적으로 알 턱이 없지 않은가. 또는 과거의 영광에 눈이 멀어버린 자. 영광의 권좌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자리는 삭아 없어진 지 오래라는 사실조차 삭혀 없앴다. 그래서 또 미룬다.


이 사람은 가끔 각성한다. 미루지 않기 위해 뭐든 시작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나, 허망하도록 쉽게 그 일은 또 벌어진다. 또 벌어지고야 만다. 이것은 이 사람의 관점. 그러나 그 일은, 그 사람이 벌이고야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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