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sa Nov 23. 2024

사랑의 정의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을 읽고

계획형 J와 즉흥형 P의 차이, 낭만주의자 F와 현실주의자 T의 차이

요즘 말하는 MBTI 만큼의 차이에 대한 모순이 소설 속에 있었다.

삶의 내면 모든 것이 모순투성이라는 작가의 말.


그런 점 때문일까?

무엇을 따라도 모순의 벽과 맞닥뜨려지는 인간의 삶에 관한 진술을 말하는 

소설 속 세계관에 속절없이 빠져든 것은.


현실 속에서 말하는 진리와 감춰뒀던 마음속 진실에 대한 모순이 있음을, 

하지만 모순을 인지한대도 인생이 180도 달라지는 일은 없을 거라는 또 하나의 다른 모순이 있음을 

나는 더욱 깊게 알게 되었다.


“좋은 책이 있는데, 독서 모임 번개로 열어서 생각 나누실 분 모집합니다.”


친구의 SNS에 올라온 책 문구가 좋았던 것도 있고, 

평소 친구가 생각하는 부분들에 큰 영감을 받았기에 큰 고민 없이 참여하고 싶다고 손을 들었다.


서점에 가서 직무 관련 외에 내 돈을 주고 소설책을 사 본 적이 있던가

특히 이런 류의 책은 종류가 있는지도 모르고 코너를 지나갔을 것이다. 

평소라면 만날 수 없었을 책을 만나 인생책이 되었다. 

모순은 지금의 나에게도, 미래의 나에게도 큰 영감을 줄 책이다.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문구, 독서모임이 진행된 약 3시간 동안의 이야기와 내 생각을 덧붙여 좋은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뭔가 인생 한 구절 정도는 펼쳐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역시나 과한 기대를 가지는 글은 잘 써지지 않고, 

미루고 미루다 결국 지금처럼 단어 가득 허세가 들어 있는 그저 그럴 결과물의 글이 남을 것이다.

딱 명징하게 생각이 또렷할 때 글을 썼어야 했는데, 단 한 번의 미룸이 벌써 2주가 넘어가게 만들어 버렸다.

이러나저러나 문장을 만들어가 봐야지.




⚠️ 결과가 포함된 글이므로, 책이 궁금한 사람은 일단 읽어보고 올 것!








사랑의 결론과 결혼으로의 결말이 이어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무엇이 사랑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

     사랑의 정의가 바뀔 수 있는가?


주인공 안진진의 사랑에 대한 결론은 김장우였다. 

물론 나영규 또한 어찌 보면 사랑일 수 있다고 표현했으나, 

많은 성찰과 로맨틱한 표현, 미래에 함께하는데 오는 두려움마저 모조리 김장우의 몫이었다.


거기에 나영규는 없었다. 

오히려 나영규의 인생계획표에 내가 하나의 부품이 되어가는 부분에 안진진은 공포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런데 최종 선택이 결국 나영규라는 결말이라니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이모에 대한 사건과 아버지의 복귀가 없었다면 

안진진은 김장우를 선택했을 거라고도 이야기했다. 


물론 소설 속에 [반전]이라는 장치와 어떤 벼락같은 깨달음을 주기에 당연한 사건이라고도 생각한다. 

그것 때문에 안진진의 최종 선택이 변했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앞선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었더라도 

결국 안진진은 김장우가 아닌 나영규를 선택했을 것이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김장우와의 사랑을 확신하면서도, 나영규와의 헤어짐을 준비하면서도 

안진진은 내가 나영규를 사랑할 수도 있겠을 지점까지 항상 같이 생각했다.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보장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김장우의 얼굴에서 문득 아버지의 얼굴을 읽었다. 너무 특별한 사랑은 위험한 법이었다. 너무 특별한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만 다른 길로 달아나버린 내 아버지처럼. 김장우에게도 알지 못하는 생의 다른 길이 운명적으로 예비되어 있을지 몰랐다. 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사랑조차도 넘쳐버리면 차라리 모자란 것보다 못한 일인 것을.


안진진이 정의하는 여러 사랑의 정의에서 결국 마지막 붉은 신호등은 [안전을 보장하는] 매개체이다.

안진진이 김장우에게서 아버지를 투영하며, 너무 특별한 사랑은 [위험]하다고 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특별하게 사랑했음을 알기에, 그 사랑이 어머니와 가족을 불행에 빠뜨렸음을 알기에

붉은 신호등이라는 정의에서 김장우는 안진진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안진진에게 결혼은 종착지의 의미가 아니었다.


만약 사랑을 종착지라고 생각했다면 김장우를 골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머니와 이모의 삶을 가장 극적으로 바라본 안진진의 삶에서 

결혼은 끝이 아닌 새로운 갈림길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작가의 말에 쓰여있던 “이론상의 진실과 마음속 진실은 언제나 한 방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에 가장 들어맞는 결말이 아니었을까?






나영규와 이모부가 비슷한 미래의 길을 걸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질 수 있을 때, 

이모의 죽음의 결괏값을 보고도 왜 나영규라는 길을 선택했을까?


아마 이 소설을 볼 때마다 생각이 이리 튀고 저리 튈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아직 안진진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다.

끊임없는 고찰 속에서 안진진은 사랑을 택했다. 그리고 나영규와의 헤어짐으로 결론이 났다.


어떠한 선택에 정답은 없고, 최선의 선택또한 없을 수 있다. 

하나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갈래는 수만가지다.


하지만 앞서 내가 짐작한 것처럼, 이모의 선택이 안진진에게 어떤 영감은 주었을지언정 선택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진진은 이 속에 명백히 ‘나’라는 존재가 구분됨을, 그 누구도 각자의 삶은 각자의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안진진은 처음부터 이모와 본인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꼈지만, 둘을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안진진과 이모는 그 삶의 결말이 같을지언정 과정마저 모조리 절대 같은 삶이 아닐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임에 틀림없으니까.
나는 나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나를 학대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모를 많이 닮았지만 그러나 이모의 딸은 아니었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이모는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왜 죽음이 가장 쉽다고 했을까?



이모의 선택이 요즘 현대인의 고민 그리고 공허함과 많이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변화를 필요로 하지만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지 못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들.

아마 행동은 사소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모는 삶에서 행동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사소한 행동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느껴진 것이겠지.

죽음이 가장 어려운 것인데, 때로는 사소한 것을 하지 못해서 가장 어려운 것을 선택하는 것 같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는 거대한 불행 앞에서 차라리 무릎을 꿇어버리는 것이 훨씬 견디기 쉬운 법이다.


이 소설에서 언제나 행복한 길을 걸었던 이모의 결말을 예견한 문장이었을까?

삶의 과정 속에서 이모는 안진진에 비해 보다 단단해질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채 너무도 평온한 삶을 살아왔다.


어려서는 딸을 아끼시는 아버지에 의해, 그리고 커서 결혼한 뒤에는 아내를 아끼는 남편에 의해 언제나 순탄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 삶은 누구나 꿈꾸는 완벽한 삶이지만 반대로 삶의 고뇌를 분출할 수 없는, 

온전히 유쾌하기만 하도록 강요당한 삶이기도 하다. 누구에게 불평할 수도 없는 꿈에 그린 듯 안락한 삶.


그러니 그림 같은 삶을 깨부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도 못하는 여리고 여린 삶에서 

이모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이기적인 선택은 ‘죽음’ 뿐이지 않았을까.






엄마와 이모의 모순, 태어나서 변하지 않는 무언가와 길러지는 무언가



주체성은 타고나는 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엄마와 이모의 삶과 그 수용방식에 대해(삶을 계속 살아가는 것, 죽음을 선택하는 것)


나는 이모의 성향이 엄마의 삶을 살았다면? 엄마의 성향이 이모의 삶을 살았다면? 이라는 무의미한 가정을 해본다.


아마도, 두 사람의 선천적인 어떤 기질에 의해 둘의 삶은 어떤 갈래로 어떻게 틀어지더라도 똑같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 쪽에서 삶을 선택하든, 죽음을 선택하든. 나는 그것이 그저 상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어느 정도는 사람의 기질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살아온 환경에서 그 기질이 더욱 짙게 발현하거나, 

전혀 다른 쪽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 기질이지만 

또 그와 반대로 살아가며 약화시키거나 길러내는 것이 기질이라고도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 한 번이라도 세계를(기질을) 넓혀 볼 경험을 했느냐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행동의 변화, 예를 들면 우리가 이모의 입장이었다면 

이모부의 대화에 부정을 한다거나 다른 행동을 한다거나의 반항이 꽤나 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쉬운 변화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장 쉽지 않은 선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힘든 상황에서 ‘힘내자, 파이팅’이라는 말을 별로 안 좋아한다.

내가 힘이 나지 않는다는데, 

왜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이 나에게 힘을 내야 한다고 강요하는가라는 아주 반항적인 생각이 든다. 


계속 힘을 내서 사는 게 오히려 버겁게 다가올 수 있다는 부분에 너무나 공감을 한다.

힘이 드는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떠한 말도 붙이지 않고 묵묵히 옆에 있어 주는 것.


사람이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은 그 사람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계속 옆에 있어주는 것 

즉, 고립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연결이 된다는 느낌에 근원적인 힘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저 힘내서 살아가는 것 외에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은 

나의 주도성, 주체성에 근거한다.


내가 무언가를 온전히,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있어야 사람이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인생을 통틀어 봤을 때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거나 해낼 수 없다.


때로는 개인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회 전체, 혹은 자연의 어떤 부분에서 오는 무력감이 분명히 있다.

만약 원동력이 삶의 주체성이라면, 그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왔을 때 인생이 끝나게 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하나다.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주체성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살아봤는가?”


딱 한 번이 중요하다. 떠밀려오는 무력감 속에서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이유는, 일어나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상황이 엄마를 궁지로 몰았을 때 엄마는 그 안에서 계속 살아가기를 선택했고, 스스로 개척해 나갔다.


엄마는 ‘살기 위한’ 모든 것을 했던 것과 반대로 

이모는 변화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고 그저 포기했다.


아마 시대적인 한계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안타깝다. 

자식과 함께하는 삶을 생각했다면, 미국에 가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저 죽음이라는 결론을 내릴 뿐이었을 이모는 무덤 속 같은 평온에서 더 이상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간의 외부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것도 있겠지만,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이 묻어나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이모부와 주리, 주혁의 삶이 많이 생략되어 있다. 이모의 상실로 그들의 삶은 어떤 변화가 있을까?


이모부와 주리, 주혁의 삶은 안진진의 시선에서 조금 빗겨 난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 또한 그 셋의 삶을 단편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실제로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아왔든 우리는 결국 안진진의 독백과 이모의 극단적인 선택에서 그들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물론 소설에서는 여전히 기차가 정시에 출발하고 도착할 것이라는 안진진의 설명이 들어가 있지만.. 

나는 분명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서 그들이 변화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변화가 긍정적 일지 부정적 일지는 가늠할 수가 없다. 

일례로 주리의 결혼사진 속에서 그녀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아마 그녀가 살아온 생애 동안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라는 설명이 있다.


여기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를 인용하고 싶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가치관과 행동이 반대가 될 때 모순이 생기고, 인지 부조화가 생긴다고 한다."


힘든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견디는가를 봤을 때 행동을 신념에 맞추거나, 신념을 행동에 맞추거나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고 하는데, 대개의 경우에서 신념이 없는 것처럼 무시, 회피의 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이모부는 이모의 죽음을 가장 처음 마주했을 때, 그녀의 죽음을 ‘배신’으로 표현했다. 

나에게 배신했으니 좋은 여자가 아니라고 왜곡하며 존재에 대해 부정해야만 

자신이 그동안 살던 정시에 도착하고 정시에 출발하는 삶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이 살기 위해 그 사람을 아름답게 추억하던, 

못된 사람으로 만들던 본인에게 편한 방법으로 떠난 사람을 왜곡하는 것이다.


아마 이모부, 주리, 주혁 모두 이제까지의 (전혀 불만이 없는) 안온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본인의 아내, 엄마를 나약하다는 식으로 기억의 한 구석으로 몰지 않을까 짐작이 간다.


다만 이 것은 모두 짐작일 뿐이다. 

결국 소설은 주인공인 안진진의 세계로 제한되며, 

이모부와 주리 그리고 주혁의 삶은 안진진과는 전혀 다른 궤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너무 행복할 것만 같은 삶도 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불행이 있겠다 정도의 감상으로 

이 충격적인 선택에 한 마디를 덧붙일 뿐이다. 

이모의 유일한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 죽음뿐임에 그저 안타까워할 뿐이다.






나영규에게는 유일한 예외가 안진진이었을 것 같다. 

그것이 이모의 삶과는 다른 결말로 안진진을 유도하게 될까?


어쩌면 내게 가장 동질감을 느끼게 했던, 혹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던 나영규.

소설 속 인물 중 가장 ‘완벽함’으로 묘사됐던 나영규는 왜 안진진과 결혼하려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린 듯이 닮아있는 연인들이었다.
김장우는 내 속에 들어있는 자기를, 나는 김장우 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나를 들여다보며
서로의 사랑을 키워 나갔다.
그래서 김장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몹시 자연스러웠지만,
나영규의 고백을 들을 때는 어쩐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 불편했다.

그런 나영규가 하필 내 발치에 사랑이란 감정을 부려놓다니 그것이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내가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들여가보면서 김장우보다 나영규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러므로 지극히 타당한 일이었다.

나영규라는 남자, 이토록 못나게 생긴 나 같은 여자를 사랑하겠다고 마음을 먹다니,
고맙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고마움도 사랑이라면.


인생의 계획표를 순리대로 따라가고자 하는 나영규는 왜 안진진과 함께 하려고 했을까라고 상상해 보면,

한 가지의 냉소적인 생각과 한 가지의 로맨틱한 생각을 하게 된다.


먼저, 소설 속에서 안진진이 연애 프로그램을 보며 짝을 맞춰보는 과정을 묘사할 때,

“사람들은 자기에게 최선은 안될 거라고 생각해서 항상 차선을 고른다. 선남선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표현하는 대목이 있다.


어쩌면 나영규에게 안진진은 내가 가질 수 있는 여자들 중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 줄 차선책에 지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인생계획서가 있는 나영규에게, 최선의 여자는 불확실한 선택지다. 실패확률이 높으며, 계획대로 이뤄지더라도 여전히 최종 종착지에 다다르는 순간까지도 모호한 계획인 것이다.


그에 반하여 안진진은 비록 많은 것들이 부족할지언정 모든 것이 솔직하고, 그의 인생 계획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최악의 선택지는 아닌 ‘차선의 선택지’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면 소설 속의 모든 낭만을 내팽개치고 그저 냉소적으로 책을 보고 덮은 사람이 될 테니, 로맨스 관점으로도 한 번 보자.


나영규에게 안진진은 유일한 예외다. 

그의 인생계획대로였다면 그녀는 프러포즈를 하는 순간 결혼 승낙을 했어야 했고, 

조금 고민을 하더라도 어느새 그의 품에 안겨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안진진은 그의 프러포즈에 ‘거절’의 답을 내놓으려고 시도했다.

만약 나영규에게 안진진이라는 여자의 의미가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 거절에 재빠르게 다른 계획표를 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안진진의 대답을 회피했다. 

긍정적 대답이 아님을 알고, 그 순간에 본인의 후퇴 없음 인생에 예외를 만들어 낼 것이다.


결국 이런 모든 부분은 가능성의 영역일 뿐이지만,

나영규에게 적당한 타이밍에 나타난 적당한 여자였을 수도 있겠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짜임새 있는 인생계획서에 나타난 새로운 낭만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90년대 소설, 그러나 여전히 베스트셀러


나는 이 책에 어떤 사전정보도 없이 구입했기 때문에, 

책을 다 읽고 초판 인쇄 연도를 확인하기 전까지 현대 소설이라고 생각했었다.


90년대 나온 소설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고, 

진진이의 고민과 선택들이 현대인들도 할 법한 고민들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갈래 속에 인생 책이라고 생각하게 된 건, 

진진이의 선택에 대해 복합적인 마음이라서 그 모순 자체가 굉장히 맘에 와닿았기 때문인 것 같다.


A or Not 또는 A 아니면 B가 정확한 답이 아니듯이 

안진진의 김장우와 나영규에 대한 사랑의 정의 그리고 이모와 엄마의 삶에 대한 표현처럼 

모순적이고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라고 느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소설임을, 

그래서 그 한계가 안타까웠던 이유는 안진진의 선택이 결국 [결혼]으로 귀결되는 것뿐이다.


안진진에게 결혼이라는 선택지밖에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새로운 출발, 내 온 생에 온 마음을 다해 최선을 다한다는 그 다짐이 

결혼으로의 다짐으로밖에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 조금 답답했다.


주리처럼 다른 길을 걷는 여성도 분명 나오는 시기이지만 그 시대에서는 결혼이 당연한 일이고, 

특히 안진진의 삶을 돌이켰을 때 새로운 삶을 꿈 꾸기란 어려우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베스트셀러 역주행으로 인기 있던 모순을 이 기회에 읽고,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어떤 길을 선택하건, 결국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 혹은 미련 어린 상상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가지 않은 길 대신 간 길이 더욱 소중해지도록 그 선택을 하는 순간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 Hidden Lake, United State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