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메달에 대한 무의식적인 열망이 아픈 나의 어린 시절
"금메달이에요!!!! 금메달!!!"
"이번에는 꼭 노란색 메달을 걸어드린다고 약속 했는데..." - 김민종 선수 은메달 인터뷰중
"금빛 사냥!"
머나먼 타지에서 나는 태극기가 나오는 경기를 시간맞춰가며 찾아보고 있다. 양궁, 사격, 펜싱, 유도... 4년에 한번 보는 이 경기들은 내 심장을 뛰게 만든다. 한국인으로써 국뽕이 차오르는 올림픽 기간이다. 나의 항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한국팀에 대한 열렬한 응원으로 분출해 본다.
영어 해설은 맛깔이 안나서 한국 해설을 굳이 찾아보고 있다. 여러 종목의 해설을 듣다 보니 결승에 올라가기까지, 그리고 결승을 올라가서 금메달, 메달이라는 말을 몇백번이고 듣게 된다. 금메달에 대한 기대, 금메달을 받을수 있을까에 대한 분석, 우리나라의 역대 전적, 이번에 금메달을 따면 몇십년만에 처음이라는 둥 수십번 듣게 되는 금금금 이야기. 이 선수는 세계랭킹 몇위이기 때문에 충분히 메달 가능성이 있다는 둥...
모든 스포츠가 비슷하겠지만, 특히 3분 남짓한 시간을 상대와 싸우는 유도 선수들을 보면서
'저 3분을 위해서 4년을 하루가 멀다하고 훈련을 하고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다니, 저 3분이 저 선수의 커리어를 결정하다니... 스포츠의 세계는 정말 잔인하고 냉철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 모든 선수들 (그리고 출전하지 못한 선수들까지도) 지난 3년동안 이 무대만 보고 훈련을 해왔을텐데, 금메달을 받는 사람은 전세계 통틀어 고작 300명 남짓. 우리나라는 단 10개 안팎의 금메달을 딸 거라고 생각하니 기쁘면서도 뭔가 씁쓸한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금/은메달의 색깔을 가누는 결승 경기를 보다보면, 은메달은 지고나서 받는 메달이라 아쉬움이 더 큰 것 같다. 금메달을 눈앞에 두고 놓쳤으니 아쉬울 만 하다. 동메달매치는 그래도 올림픽의 마지막을 승리로 장식하고 받는 메달이라 (색깔은 아쉬우나) 기분 좋게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시상식을 보면 동메달을 받은 나라 선수들 얼굴이 확실히 더 밝을 때가 많다.
어렷을 적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반에서 1등을 못하면 꼭 뭔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을 느껴왔던 시간이 나에겐 10년정도 있다. 초등학교 2학년, 중간고사 4과목에서 6개를 틀려온 날, 비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맞았다. 난 솔직히 잘 했다고 생각하고 집에 와서 엄마에게 자랑하듯이 "나 6개 틀렸어" 이렇게 말했는데, 돌아온 건 회초리와 엄마의 고성뿐이었다. 중학교 시절, 잠깐 H.O.T 덕질한다고 성적이 전교 20등권으로 떨어졌을 때, 나는 아빠에게 빠따로 엉덩이에 천불이 나도록 맞았다. 그 뒤로는 반 1등, 전교등수 한자리 수를 놓쳐본 적이 없다. 잘 하면 본전, 못하면 나락이었다. 공부가 스포츠는 아니지만, 그 땐 적어도 내가 반에서 1등이 아니면 슬프고 무섭고 두렵고 화가 났었다. 누가, 나에게 그런 추상적인 압박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부모님이겠지), 항상 잘해야 된다, 성공해야 한다, 1등을 해야한다는 무언의 압박에 시달리면서 공부를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금 금 금을 외치는 올림픽 해설이 난 왠지 불편하다. 막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서 사회생활까지, 나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을 무수히 봐 왔다. 그동안 왜 1등에 그렇게 집착했는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나의 성적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있고 자기 자신만의 역량이 다 다르고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다 다르다. 이런 개인들이 모여서 자기 자신만의 능력을 꽃피우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곳이 세상이다. 스포츠와는 다르게 이 모든 사람이 금메달을 딸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고, 금메달을 꼭 딸 필요도 없는 것이 사회이고 인생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특히 한국 사회는) 아무에게나 모든 것에 1등을, "잘" 할 것을 강조한다. 공부가 싫은 아이에게도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말하고, 운동을 했으면 국가대표가 됬을 아이를 책상에 앉히고 공부를 시킨다. 그림을 그렸으면 피카소같은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됬을 아이도 무작정 공부를 한다. 운동을 조금 잘하는 것 같으면, 아예 공부는 던져버리고 스포츠에 올인한다. 그렇게 해서 엘리트 선수가 되지 못하면 갈 길을 잃게 되고 살 길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90년대 2000년대 올림픽만해도 금메달 못 따면 대역 죄인이 된 듯 눈문을 글썽이며 국민들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공부이든 스포츠이든 엘리트 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가 언제쯤 다양성을 인정하고 모두의 능력과 노력을 축하하고 존중해주는 분위기로 바뀔까. 과연 올해 양궁 여자 단체팀이 역사적인 10연패를 이루지 못했다면 범국민적인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언론들은 이번엔 왜 금을 못땄는지 분석을 해댈 것이고, 몇몇 몰상식한 국민들은 내 그럴줄 알았다며 인터넷에 댓글 테러를 했겠지. 아마 선수들은 너무나도 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중하게 국민들께 사과의 말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이 사람들에게 금메달을 맡겨지 않았는데 말이다. 지금은 그래도 동메달 은메달도 축하를 해주고 언론의 주목도 받고 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만 메달 사각지대에 있는 비인기 종목들은 얼굴도 비추기 힘들다. 4년에 한번 있는 큰 무대인데 중계도 받지 못하고 스폰서도 광고는 상상도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모든 상황이 아쉽고 미안하고 안쓰럽다. 1등을 못하면 대역죄인이 되있었던 그 때의 쓰라린 기억들이 아직도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가끔 다른 나라 선수들 중에 정말 올림픽에 출전한 그 자체를 즐기는 정말 행복해보이는 선수들을 볼 때가 있다. 결과에 상관없이 만면의 미소를 띄고 자신의 경기를 즐기는 선수들을 보면, 내가 다 행복해지고 그 선수들의 튼튼한 마음이 부럽게 느껴진다. 메달을 따지 못한, 금을 따지 못한 선수들에게 '1등이 아니면 어때? 괜찮아! 잘 했어!! 넌 너의 존재 자체로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야!' 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마 내가 커가면서 항상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1등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 성적과는 상관없이 넌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그 느낌, 자존감, 행복, 내가 유년시절 절실히 느끼고 싶었던 느낌을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금메달을 바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누가 1등을 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한 경기의 성적이나 시험 결과, 자격증 합격 여부 등등 이 사회에서 정한 임의의 조건에 의해 평가받고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올림픽에 출전한 모든 대한민국 선수들은 이미 나에겐 금메달 감이다. 성적에 상관 없이 세계인의 축제를 마음껏 즐기고 그 안에서 행복이라는 금메달을 받고 왔으면 좋겠다. 올림픽을 보면서 어렸던 나를 쓰다듬어 준다. 그때 꼭 1등을 하지 않았어도 됬었다고, 너는 너대로 예쁘고 아름다웠다고.
대한민국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