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쿠버에서 만난 반가운 얼굴에 눈물이 났다.
지난 연말에 생에 두번째 코로나에 걸리고 나서 3주를 심하게 앓았다. 그 뒤에도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이 간질거리고 잔 기침이 멈추지 않아 2024년의 첫 몇달을 잔병치레를 하며 흐물흐물 삶은 콩나물처럼 지내오고 있었다. 몸도 편치 않은 상황에서 3월에 출장이 2주나 있어 잔뜩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일은 잘 해내야 하고, 몸은 아프고 피곤하고, 마음도 피폐해진 상태에서 오렌지 카운티로의 첫 출장을 겨우겨우 끝마쳤다.
두번째 출장지인 벤쿠버는 봄 기운이 한창이었다. 몇일을 더해 조금이라도 이곳에서 시간을 즐기고자 출장 이틀 전인 토요일에 일찍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화창한 날씨아래 바다 건너 보이는 산 정상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햇살에 반짝거렸다. 3월의 벤쿠버 답지 않게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 덕분에 사람들도 두꺼운 외투를 벗고 다들 나들이를 나왔다. 저번에 왔을 때 추운 겨울 눈보라 속에서도 아름다웠던 벤쿠버였는데 겨울 옷을 벗고 화창한 파란 하늘 아래의 모습은 더더욱 빛이 났다. 남편이랑 처음 왔을 그 겨울에도, '아, 여기로 이사와서 살고 싶다'라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화창한 봄날의 벤쿠버는 나를 더욱 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지게 했다.
나도 이 좋은 날씨에 가만히만 있을 수 없어 공용자전거를 빌려서 워터프론트 산책길을 따라 스탠리 파크까지 가 보기로 했다. 조깅 하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가족 단위로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가는 길 내내 북적였다. 자전거를 타면서 신나게 달려가던 중 노란 꽃이 내 눈길을 끌었다.
개나리였다.
개나리라니!
나는 달리던 자전거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내가 본 그 노란 꽃이 개나리임을 확인했다. 정원수로 심어진 듯한 아담한 사이즈의 개나리 나무였지만 개나리가 분명했다. 개나리라니! 왈칵 눈물이 났다. 10년 넘게 못만난 오래 된 친구를 길에서 우연히 만난 느낌이었다. 뭔가 알수 없는 따뜻하면서 뜨거운 사랑같은 감정이 소용돌이 쳤다. 개나리를 보고 울컥해진 나를 보며, 나도 나이가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갑자기 밀려온 향수와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을 때렸다.
꽃을 좋아하시는 엄마는 봄이 되면 어디선가 필락 말락 하는 개나리 나뭇가지를 한 웅큼 꺾어오셔서 꽃병에 넣어놓곤 하셨다. 그리고 일주일 쯤 지나면 샛노란 꽃이 피기 시작한다.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에도 봄이 되면 개나리 나무가 줄지어 노랑 꽃을 뽐내었다. 그렇게 개나리는 나에게 항상 봄이 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꽃이었다. 개나리랑 진달래가 꽃샘추위가 사라질 때 쯤 고개를 내밀면, 날이 풀릴때쯤 벛꽃이 만발을 하고, 날이 조금 더 따뜻해지고 나면 하양 핑크 보라 철쭉이 화려한 색깔들을 뽐낸다. 꽃들도 그렇게 자연의 순리를 따라 자기 순서를 기다려 뽐낼 타이밍을 기다리는 듯 했다.
캘리포니아에 살다보니 그런 계절 감각을 잃은 지 오래이다. 오로지 날씨가 좋은 날과 안좋은 날만 가끔 교차될 뿐, 계절이 언제 바뀌는지 어제가 겨울인지 오늘이 봄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 졌다. 실제로 한겨울인 1~2월에도 가끔 따뜻한 날이 몇일 계속 되면 이곳의 꽃나무들은 봄이 온 줄 알고 개화해 버린다. 자연에 순리에 따라 사는 식물들도 헷갈리는데 사람은 오죽할까. 샌프란시스코로 이사오면서 약간의 계절감은 생겼지만, 엘에이에 살 때는 정말 1년 내내 섭씨 20-30도를 오가는 초여름같은 날씨가 계속 되곤 했다.
미국에 온 후로는 생각해보니 개나리를 본 적이 없었다. 유채꽃이나 민들레, 아님 다른 조그마한 이름 모를 노란 꽃들은 많이 봐왔었지만 개나리는 내가 사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이나 전에 살았던 엘에이서는 전혀 볼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지천에 깔려있는 아주 흔한 꽃, 이 쯤 되면 지나가는 담벼락에서 길가에서 아무데서나 노랗게 쭈뼛쭈뼛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꽃이지만, 10년이 넘게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그 존재를 거의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런데 이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개나리 필 무렵은 나에게 새로운 출발을 의미했다. 추운 2월 겨울 방학이 끝나고, 꽃샘추위가 시작될 3월이 오면 반이 바뀌고 학년이 올라가고, 설레는 마음의 등교길에 흐들리게 만개하여 우리를 반겨줬던게 개나리였다. 알게 모르게 개나리가 새로운 한해의 출발을 알려주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특별해지는 경험을 다들 해본 적이 있을것이다. 벤쿠버에서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한 개나리를 통해 아주 찰나에 나의 유년시절, 그리고 한국의 봄을 추억하게 된 것이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고 개나리 나무들을 뒤로 했다. 자전거를 달리는 내내 마음이 그 날의 날씨처럼 따뜻했다. 내 눈가의 촉촉한 눈물과 마음 한가운데서 느껴지는 뭉클함이 잔잔하게 오랬동안 남아있었다. 이 우연한 만남에 감사하고, 나중에 마당이 생기면 꼭 개나리 나무를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오래 보고 매년 이렇게 내 어렷을 적의 수많은 한국의 아름다운 봄들을 추억할 수 있도록.
P.S. 진달래도 미국에서는 정말 보기 어려운 한국의 산꽃이다. 철쭉과 벛꽃은 자주 볼 수 있다. 이 곳에서는 튤립과 벗꽃, 히야신스, 수선화, California Poppies 가 대표적인 봄 꽃이다. 꽃은 종류를 불문하고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아지고 아름다운 듯하다. Hello, Sp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