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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Oct 06. 2022

삶의, 삶에 의한, 삶을 위한 리터러시

바벨탑이 아닌 다리로서의 리터러시를 꿈꾸며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발간하는 <함께여는국어교육> 2022년 가을호는 문해력을 주제로 꾸며졌습니다. 저는 마지막 글인 시론으로 함께했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리터러시와 사회, 삶을 위한 교육적 실천을 고민하는 분들과 함께 읽고 싶습니다. 


[시론] 삶의, 삶에 의한, 삶을 위한 리터러시*: 바벨탑이 아닌 다리로서의 리터러시를 꿈꾸며


가르치며 살아가는 일이 때로 버겁습니다. 기후 위기 속 생태계가 파괴되고, 잔혹한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며, 차별이 일상 곳곳에 파고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업 준비와 실행에 온갖 애를 써 봐도 교실에서 걷어낼 수 없는 불평등의 그림자, 공고한 표준화 시험의 벽과 밀려드는 업무, 교육에 온전히 몰입을 어렵게 하는 행정 업무에 이르기까지 학교를 둘러싼 환경은 녹록지 않습니다. 말글을 짓고 나누는 일에서 가치와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일은 끊임없는 도전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문해력의 지형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개인이 텍스트를 다룰 때 어떤 인지적 과정이 수반되는지에 주목했던 리터러시 연구는 맥락과 관계를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의사소통적 리터러시로, 어떤 담화 상황에서도 도도히 작동하는 사회문화적, 정치적, 제도적 권력에 주목하는 비판 리터러시로, 역동적인 담론의 흐름과 새로운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포함하여 세계를 읽고 쓰는 멀티리터러시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신기술 개발의 가속화로 인간과 인공지능이 협력하고 경쟁하는 가운데 언어 생산과 수용에 있어 새로운 윤리가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그 가운데 여전히 전통적인 문해력의 과제, 즉 학생 개개인이 문자를 해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역량 부족에 대한 진단과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십 년 논의되었던 리터러시 교육의 기본과제조차 해결되지 못한 채 온갖 해법이 난무합니다. 애석하게도 종종 그 책임은 리터러시 교육의 최전선에 있는 교사들의 어깨에 고스란히 지워집니다.


저 또한 리터러시 연구자이자 교사로서 현재 상황을 보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다양하고 화려한 테크놀로지를 동원하여 수업을 진행하지만 리터러시의 근본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거나, 리터러시를 교묘하게 표준화 시험을 위한 독해 및 독서역량으로 축소하여 상업적 표어로 둔갑시키는 경우를 봅니다. ‘책인가 영상인가’라는 뭉툭하고 이분법적인 질문, 혹은 미디어 생태계의 변동과 학생들의 생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생산적 논란이 여전히 있고, 언어와 인문의 가치를 공학적 해법의 하위에 놓는 기술 중심주의적 리터러시 담론이 힘을 얻기도 합니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담론과 실천이 경합하고 충돌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짧은 지면에 담기에는 필자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대신 제가 리터러시 교육에 대해 품고 있는 ‘삶의 리터러시, 삶에 의한 리터러시, 삶을 위한 리터러시’라는 화두를 선생님들과 함께 나누려 합니다. 


 휘몰아치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실천은 새로운 유행을 바삐 좇는 개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단단한 원칙과 열린 마음의 가치를 믿는 공동체의 연대와 소통으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삶의 리터러시인가: 교과 내용에서 본 리터러시


먼저 ‘삶의 리터러시’라는 문제의식입니다. 이는 교과가 다루는 리터러시의 영역, 즉 교과의 내용과 관련됩니다. 1954년 1차 교육과정에서부터 현재 시범 운영되고 있는 고교학점제, 새로운 교육과정의 세부 내용에 대한 논의까지 학교 교육의 내용은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고 그 과정에서 많은 교사와 연구자, 교육 관료의 의견이 반영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현 교육과정이 삶의 리터러시에 복무하는 내용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이는 개별 교과를 훌쩍 넘어 교육과정과 교과 전반을 관통하는 문제입니다.


제가 몸담은 영어 교과에서 시작해 봅시다. 영어 과목이니만큼 당연히 영어를 배우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 ‘영어’의 실체를 보면 특정 문화권과 인종, 특정 지역에 국한됩니다. 구체적으로 미국 영어, 그중에서도 교육받은 중산층 백인의 영어, 미국 북동부 지역 발음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표준영어’를 기준으로 교과 내용이 구성됩니다. 언어 문화적 다양성이 강화되는 추세입니다만 여전히 ‘영어’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상에서 나열한 기준에 부합하는 ‘그들의 영어’입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자신이 사용하는 영어를 늘 부족하며 비표준적인 것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하며, 계속해서 자신을 결핍된 존재로 규정합니다. 자기 삶을 살아있는 언어로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삶을 정형화된 언어로 흡수합니다. 한 드라마의 대사처럼 많은 학습자는 영어를 배우며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완벽한’ 영어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원어민 중심주의(native-speakerism)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고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확장하다 보면 교육내용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마주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교과는 인간중심주의에 기반해 왔습니다. 근대 이후 세계의 명백한 주인은 인간이었고 학교는 인간중심 세계관의 굳건한 수호자였습니다. 여러 철학자, 사회과학자, 비판이론가들이 지적하듯 여기에서 ‘인간’의 전형은 서구의 비장애인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었습니다. 이들을 정점으로 인종과 국가, 다양한 문화와 정체성 사이에 암묵적 위계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위계에서 발생하는 권력은 비서구인을, 장애인, 유색인종, 성 소수자, 여성을 여러 모양으로 차별하고 배제해 왔습니다. 나아가 인간중심주의는 다양한 동식물과 미생물, 산과 강, 대지와 바다를 개발과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존재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그들이 공존하는 생태계의 아름다움을, 정복하고 착취하고 차별하지 않는 소소한 삶이야말로 진정한 기쁨이요 특권임을 배우고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이 세계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가? 교과 내용을 재구성하는 가운데 나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을 고르게 초대하고 있는가? 사회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또 정체성의 측면에서 다양한 주체들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가? 성공의 서사 뒤에 가려진 실패와 슬픔의 이야기는 어떻게 들려줄 수 있는가? 한국인의 국어를 넘어 이주노동자들의 한국어를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주어진 교과 내용과 학생 사이의 공간에서 나는 어떻게 세계의 다양성을 담아내고 ‘삶의 리터러시’를 지어갈 수 있을까? 이를 통해 나는 어떻게 교과내용(敎科內容)의 정의(正義)를 세우고 실천하며 공유하고 확장할 수 있을 것인가?’


삶에 의한 리터러시인가: 교수학습 방법에서 바라본 리터러시


다음은 ‘삶에 의한 리터러시’의 문제의식입니다. 삶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그간 배제된 존재를 대표하는 교과 내용이 마련된다고 해도 그것이 모든 이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교육될 수 없습니다. 구성주의 교육학의 기본 원리가 말하듯 지식은 잘 포장되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문화와 시공간 속에서 특정한 개인과 공동체에 의해 구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리터러시 교육에 적용하여 본다면 우리는 가르치고 배우는 내용이 구체적인 삶에 기반한, 그 삶을 영위하는 주체들의 몸과 생각과 감정에 뿌리박은 ‘삶에 의한 리터러시인가’라는 질문에 닿게 됩니다. 이는 교수학습 방법론에 대한 태도와 철학에 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리터러시 생태계가 빠르게 변화하고, 전통적인 교과 평가의 미디어와 학생이 경험하는 생활 세계의 미디어 간에 깊은 균열이 감지되는 이때, 리터러시는 교사와 학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삶에 의한 리터러시’로 재개념화(reconceptualization)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교사의 권력, 아니 ‘교사에게 주어진 권력’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교사에게 강요되고 있는 표준화 평가의 권력에 저항하는 가운데 온전히 교사와 학생들에게 맡겨진 시공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제도권의 압력이 미치지 못하는 그런 시공간 말입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학습, 더 많은 평가, 더 많은 기록이 아니라 더 풍성한 대화, 더 재미있는 일탈, 더 자유로운 표현을 실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실에서 학생들이 당면한 삶의 과제, 그들이 향유하는 미디어, 그들이 넘어서고자 하는 기성 체제에 대한 비판이 수업에 녹아들 수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일방적으로 정의한 리터러시가 아니라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지어가는 상호존중의 리터러시가 창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쁨의 시공간을 조금씩 열어젖힐 때 비로소 교수학습방법(敎授學習方法)의 정의(正義)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저는 선생님들과 함께 대부분 교실이 당면하고 있는 ‘다름’의 문제를 새로운 틀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는’ 학생들이 한 교실에 모여 있습니다. 서울 중심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다문화 가정 학생의 비율이 급격히 높아집니다. 사교육을 풍족히 받을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이 한 학교에 공존합니다. 여기에 다양한 소셜미디어와 게임 및 동영상 플랫폼이 일상의 주 무대가 된 세대는 놀이터와 운동장, 두어 개의 텔레비전 채널과 서너 개의 신문을 공유했던 세대와는 다른 디지털 생활 세계의 다양성과 격차를 보여줍니다. 이런 다름 중 많은 부분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야기되기에 정치적이며 제도적인 해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그저 ‘문제’로만 볼 때 우리는 ‘서로 다른 지식과 경험, 감수성과 태도를 가진 인간들이 모인 사회’로서 교실이 가지는 교육적 가능성을 놓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다름 속에 내재한 불평등을 지양하되, 다름이 병치되고 공유될 때 비로소 발현되는 다양성의 힘에 주목해야 합니다. ‘문제로서의 차이’가 아니라 ‘가능성으로서의 차이’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우리 자신됨을 가르친다.(We teach who we are)”라는 파커 파머의 말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학생들로 하여금 “우리는 (교육체제가 처방한 내용을 넘어) 우리 자신됨을 배운다(We learn who we are)”라고 선언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삶을 위한 리터러시인가: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본 리터러시


마지막으로 ‘삶을 위한 리터러시’의 문제의식입니다. 저는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덕목으로 겸손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겸손’이라는 기표가 어쩌면 낡아빠진 순진함으로 해석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로 그 지점에서 끝없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더 좋은 다리(bridge)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들과 같이 수십 년 언어를 중심으로 한 리터러시를 공부하고 실천해 온 저이지만 읽기와 쓰기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춤을 추는 사람은 몸으로 생각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은 곡물과 자연을 통해 생각합니다. 디자인을 하는 사람은 점, 선, 면을 통해 생각을 그리며, 음악을 하는 사람은 소리의 배열을 통해 생각을 연주합니다. 다종다양한 생각과 실천의 방식을 섞고 넘나들고 변형해 가며 새로운 사유를 열어내는 것 또한 가능합니다. 그런 면에서 읽고 쓰는 능력을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역량이라 말하며 비문해 인구를 ‘낮게’ 보는 관점은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만든 사회 기술적 환경과 19세기 이후 산업과 교육의 ‘공모’, 나아가 근대국가의 정치적 프로젝트를 망각한 이데올로기의 산물입니다. 문자 중심의 문해 역량이 사회문화적 정상성(normativity)과 결탁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로 인류사를 볼 때 지극히 최근의 현상입니다. 한국 또한 문자 해독 및 생산 능력의 중요성이 전 사회적으로 강조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입니다. 근본적으로 인류의 지혜와 지식은 텍스트뿐만 아니라 말을 비롯한 다양한 신체적 활동을 통해 생산되고 전승됩니다. 그렇기에 리터러시의 세계를 능숙하게 문자를 다루는 사람의 집합으로 축소하는 것은 리터러시의 본령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평생 글을 읽고 쓴 사람임에도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기도 합니다. ‘배운 것들이 더 한다’라는 말은 그저 비아냥에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리터러시를 학력으로, 표준화된 평가로, ‘누구나 갖추어야 할 역량’으로 정의하고 이를 통해 인간을 차등화하려는 시도에는 언제나 성찰하지 않는 권력의 폭력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말글을 다루는 사람은 더더욱 언어를 중심으로 한 리터러시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이러한 윤리적 태도를 견지한다고 해서 언어교육의 가치나 무게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20세기 이후 공교육은 다양한 교과가 요구하는 리터러시 역량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공유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매개(mediation)는 단연 말과 글입니다. 현 시기 민주주의의 작동에서 가장 기본적인 미디어가 문자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소위 '멀티미디어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 시대'에도 의사소통은 대부분 말과 글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쌓아 온 텍스트에 대한 지식이 ‘바벨탑’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는 일입니다. 새로운 미디어 생태계를 애써 외면하며 기존에 말글이 누려왔던 권력을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일, 지식과 기예를 쌓아 올려 자신의 역량을 세상의 ‘상층부’에 전시하려는 욕망, 관계의 윤리를 지우고 효율성의 담론을 통해 부와 권력을 획득하려는 의지, 그것이 바벨탑으로서의 리터러시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안타깝게도 ‘상위권 대학’과 ‘인 서울’, ‘스펙 쌓기’와 앙상해져 버린 ‘공정’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교육은 여전히 바벨탑으로서의 리터러시에 복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방향의 리터러시도 가능합니다. 바로 ‘다리로서의 리터러시’입니다. 교육의 의미가 인류의 지식과 지혜, 다양한 경험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데 있음을 기억한다면, 교과와 주체, 학교와 사회를 잇는 다리로서의 리터러시를 추구해야 합니다. 국어 교사들, 나아가 국어를 배우는 학생을 필두로 한 리터러시 실천가들은 말글을 중심으로 다양한 미디어와 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 세상의 수많은 존재와 소통하고 연대합니다. 그것은 동료 교사, 교원학습공동체의 구성원, 시민단체 활동가, 대학의 연구자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반 친구, 도서관 사서 선생님, 영상 크리에이터, 동네 책방에 방문한 그림책 작가, 지역에 이사 온 이주노동자 가족, 지구 반대편에서 기후정의를 위해 싸우는 동료 청소년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 음악가라면 소리로 세상 만물에 접속합니다. 농부는 대지와 작물로 지구와 소통합니다. 그렇게 각자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궁리하고 실천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끝없이 서로에게 배웁니다. 그 가운데 독서 모임, 마을공동체, 풀뿌리 시민행동, 다문화·다언어 교류의 흐름이 만들어집니다. 각자는 자신이 지닌 리터러시를 활용하여 세상을 향한 더 나은 다리가 되는 방법을 고민하고, 그렇게 고민하는 사람들의 협력과 연대가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갑니다. 사회정의(社會正義)를 향해 반 발짝 반 발짝 나아갑니다. 


바벨탑을 무너뜨려 다리를 짓는 교육으로


‘화두’라는 이름을 핑계 삼아 성기디성긴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선생님들께 글을 쓰고 나면 배워야 할 사람은 정작 저 자신이라는 명명백백한 진실에 부끄러움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대화의 시작일 뿐임으로 저의 부족함을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실 글을 쓴 저도, 글을 읽어 주신 선생님들도, ‘삶의, 삶에 의한,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향한 여정이 길고 험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가 간절히 필요합니다. 


가끔 바보처럼 웃습니다. 하루하루 향할 수 있는 교실이 있다는 것, 거기에 제 못난 생각을 나눌 수 있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 그들의 삶을 통해 책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우주를 만나게 된다는 것,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또 제가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것, 그 길에 함께하는 동료 선생님들이 있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이 모든 것을 더욱 기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교과 내용의 정의, 교수학습 방법의 정의, 사회정의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음을 압니다. 세상의 수많은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다리를 짓는 리터러시 교육을 실천하는 우리, 서로를 환대하고 보호하며 때로 과감히 새로운 여정에 나서자고 손 내미는 우리 모두에게 고마움과 응원의 마음을 보냅니다. 



/ 자료 안내 /

리터러시의 개념적 기초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조병영이 쓴 《읽는 인간 리터러시를 경험하라》(쌤앤파커스, 2021), 리터러시 생태계의 변동에 대한 사회문화적, 교육적, 윤리적 쟁점을 살피기 위해서는 김성우와 엄기호가 함께 쓴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따비, 2020), 사회언어학적 관점에서 리터러시를 조망하고자 한다면 제임스 폴 지가 쓰고 김영란 등이 번역한 《사회 언어학과 서로 다른 리터러시 - 담론과 이데올로기》(사회평론아카데미 ,2019), 비판리터러시의 기본 개념과 적용 방법을 살피고자 한다면 힐러리 쟁크스가 쓰고 장은영 등이 번역한 《리터러시와 권력》(사회평론아카데미, 2019),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과 교육에 대한 기본 지식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김아미가 쓴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이해》(커뮤니케이션북스, 2015), 대중문화 비평의 관점에서 다양한 장르의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의 사례를 보려면 이승한이 쓴 《잘 봐 놓고 딴소리 - 드라마, 예능, 웹툰으로 갈고닦는 미디어리터러시》(북트리거, 2021)를 참고하십시오.



* 이는 물론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의 한 구절인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에서 그 구조를 차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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