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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Oct 03. 2022

소통 가능성과 소통 불가능성

언제나 언어를 의심해야 할 이유에 관하여

소통 가능성은 소통 불가능성과 짝을 이룹니다.


사람들은 같아 보이지만 다른 언어를 씁니다.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다르고, 그의 '편두통'과 나의 '편두통'이 다릅니다. 심지어 같은 물건을 가리키면서도 A가 주목하는 지점과 B가 주목하는 지점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의미는 결코 단어와 문법 안에 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묘한 감정이나 뉘앙스를 전달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별 탈 없이 소통하고 협업하며 살아갑니다. 모순과 허점 투성이 언어이지만 사람들을 연결하는 느슨한 매개체의 역할을 그럭저럭 해내는 것입니다. 물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억측과 오해가 생겨나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언어가 없으면 관계의 끈은 약해질 수밖에 없는 걸까요? 언어의 부재는 오해와 무지를 낳을 수밖에 없는 걸까요? 말글이 사라지면 서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걸까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길냥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언어의 부재가 한몫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면에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먼저 언어의 부재는 만남 그 자체로 소통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듭니다. 제가 고양이들과 특정한 언어로 소통을 했다면 그들의 마음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걸음걸이에, 발짓에, 앉고 일어서는 자세에, 혀놀림에, 움직이는 속도에, 꼬리의 움직임에, 울음소리에, 경계태세에, 몸의 떨림에, 그리고 순식간에 변하는 눈빛에 지금처럼 몸과 마음을 기울이진 않았을 것입니다.


코드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역설적이게도 코드로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몸짓들에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서로 얼마나 알아들었느냐, 즉 상징적 소통의 효율성(efficiency)이 아니라 한 공간에 함께 존재함(co-presence)이 더욱 중요하고 또 절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의 힘이 줄어드는 지점에서 서로의 실존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언어의 부재는 길냥이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대화가 아니라 탐구를 택할 수밖에 없도록 합니다. 냥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질문을 할 수 없으니 몇 시에 어디에 주로 나타나는지, 밥을 얼마나 줘야 최소한을 남기는지를 유심히 살피게 됩니다. 아울러 검증된 지식, 고양이 관련 커뮤니티에서 통용되는 상식을 찾아보게 되는데, 이를 통해 고양이의 종적 특징에 대해 좀 더 이해함과 동시에, 그런 특성이 일반화될 수 없음 또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소통의 모순이 있습니다. 소통할 수 있음은 소통의 힘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수반합니다. 언어가 있다는 것 때문에 언어의 빈틈을 보지 못 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생각과 감정을 전하기에 언어는 턱없이 낮은 해상도의 미디어인데 말입니다. "왜 말을 못 알아들어?"라는 말이 터져나오는 순간의 갑갑함을 이해하지만, 사실 '말을 못 알아듣는' 상황은 편재합니다. 못 알아 들으면서 알아들은 척하며 잘도(?) 살아가는 것이지요.


경청은 소통에 필수이지만 경청이 소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믿는 것은 순진합니다. 언어는 성긴 그물입니다. 커다란 의미를 포착하는 대신 수많은 디테일을 흘려 보냅니다. 언어의 의미는 소통이라는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소통가능성은 소통불가능성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언어를 통한 의미 교환은 소통의 아주 작은 부분인지도 모릅니다. 때론 말 몇 마디를 주워 담고는 '이 사람을 이해했어'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사람의 사고, 기호, 성향, 인생사 등에 대한 진지한 공부 없이 글 한두 편으로 그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한때 고양이들과 함께했던 경험이 준 교훈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만났다면 몸도 마음도 함께 있을 것, 이해하고 싶다면 깊은 관심을 갖고 오래 지켜볼 것, 몇 마디 말에 그 사람의 모든 걸 담아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 것.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냐옹냐옹냐냐옹. 해석하려 들지 말 것.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자 오해의 도구입니다. 분명 이 포스트도 어떤 분께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럼 어떻습니까. 한 해에 한 번 포스팅하는 '날아오르는 냥이' 사진으로 충분한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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