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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Dec 01. 2022

파업 안내 방송이 만드는 세계

비판적 '미니' 담화분석을 통한 민주시민교육 아이디어

"안내방송 드립니다. 현재 서울교통공사 노조의 파업으로 인하여 일부 구간에서의 열차 운행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께 불편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서울교통공사는 지하철 운행이 속히 정상화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확한 전사는 아님에 주의하여 주십시오.)


1. 오늘 서너 차례 들은, 기억에 의해 재구성한 지하철 안내방송이다. 워딩이 정확하진 않겠지만 대략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Photo by Liam Burnett-Blue on Unsplash


2. 이 방송의 내용구조를 하나하나 뜯어 보자. 


“안내방송 드립니다.” – 방송의 시작을 알리는 의례적 멘트. 주의집중을 요청하는 기능 수행. 


“현재” –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방송임을 맨 처음 알림. 청자의 주의를 지금의 상황에 집중시키는 역할 또한 수행. 


“서울교통공사 노조의 파업으로 인하여” – 파업의 주체를 특정한 후 “인하여”를 사용하여 파업이 다음에 언급될 사건/상황의 원인임을 명확히 함. 


(사소하지만 특이할만한 것은 ‘노동조합’이 아닌 ‘노조’라고 썼다는 점. 즉, ‘노조의 파업’이 하나의 덩이로 사용됨. 구글검색 결과를 보면 “노조의 파업”은 20만 여 건, “노동조합의 파업”은 4만 여 건이 검색됨. ‘파업’과 함께 더 자주 붙어 다니는 표현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노조’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 사회가 '노조의 파업'을 하나의 굳어진 표현으로 쓰게 되는 결과로 이어짐.)


“일부 구간에서의 열차 운행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 정확히 어디인지 특정하지 않음. 시간대에 따라서 배차 간격 조정 양상이 다르기에 ‘일부 구간’으로 표현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음. 하지만 이 표현의 효과는 은밀함. ‘일부 구간’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지금 있는 구간’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기 때문. 실제로 이 방송을 듣는 많은 이들은 전체적으로 지연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탄 열차가 운행하는 구간’을 염두에 둘 가능성이 높음. 아울러 앞선 “파업으로 인하여”의 결과는 “지연되고 있습니다”임. "파업->지연"이라는 인과 체인이 만들어짐. 


“시민 여러분께 불편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 위의 인과 체인이 확장되어 <노조의 파업 -> 지연 -> 시민의 불편> 사슬이 완성됨. 그런데 이에 대해서 사과하는 것은 뒤에 바로 나오는 “서울교통공사”임. (적어도 이 안내방송 내에서) 불편을 야기하는 주체와 사과를 하는 주체는 전혀 다름. 나쁜놈, 착한놈 따로따로임.


“서울교통공사는 지하철 운행이 속히 정상화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파업을 하는 것은 노조, 교통공사는 지하철 운행이 정상화되도록 노력하는 조직.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가 ‘비정상’이며, 이 ‘비정상’을 타개하고 시민의 불편을 줄이는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는 것은 “서울교통공사”임. 아울러 이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주체 또한 “서울교통공사”임. 노동조합은 불편의 원인으로 등장할 뿐, 그 어떤 긍정적 역할도 하지 않음. 


3.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지하철 파업 상황을 안내하는 짧은 방송은 “현재”라는 지극히 짧은 시간만을 다루고 있다. 해당 안내방송이 나온다는 것은 여전히 서울교통공사 노조가 파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쓰인 “지금”은 방송이 진행되는 시간을 말하는 듯하지만, 실상 “파업을 하는 동안”만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파업을 하는 동안 파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말인 셈인데, 그로 인해 이 방송은 반복에서 영원까지 이른다. 무슨 말인가 하면...


4. 이 방송에서 ‘지금’ 이외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시간은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고, 그로 인해 시민이 불편을 겪고, 공사는 이 ‘비정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시민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시간이다. 특히 파업 이전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초에 빅뱅이 있었고, 태초에 파업이 있었다. 파업은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모든 불편의 제1원인이다!


5. 결국 해당 안내방송 내에서 각각의 주체들은 (1) 열차를 지연시켜 ‘비정상’적 상황을 만들어 불편을 야기하고 (노조), (2) 이로 인한 지연 때문에 불편을 견뎌야 하고 (시민), (3) 그러한 상황에 유감을 표현하며 ‘정상화’를 위해 노력한다(공사). 


6. 다시 말해, 이 짧은 안내방송 안에서 주체는 특정한 역할로 위치지어지고(positioned), 그 위치는 ‘지금’이라는 시간에 한정되는 듯하지만 실상은 모든 파업에 변함없이 적용된다. 결국 노조는 영원히 불편을 야기하고 비정상을 수행하는 집단이 되고, 시민은 영원히 불편을 감수하며 지연된 열차를 타야 하는 ‘객체’가 되며, 공사는 영원히 사과를 하며 ‘정상’을 회복하려는 주체가 된다. 


프레임 밖에 더 큰 세계가 있다 (2021 촬영)


7. 언어는 세계의 사태 중 극히 일부를 잘라 의미를 만든다. 자주 언급했듯이 세계는 언어로 바로 ‘번역’되지 않는다. 세계는 언제나 인간을, 조직을, 관점과 태도와 이데올로기를 경유하여 언어가 된다. 


8. 민주사회 시민교육의 하나로 위와 같은 간단한 '미니담화분석'이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는 시간 밖에 어떤 일이 있는지 질문하고, ‘지금’이 누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언어화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다른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지 고민해 보는 것이다. 꼭 파업이 아니더라도 이런 분석을 해볼 수 있는 재료는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고, 그 중에서 중대한 사회적 이슈에 관련된 것들도 적지 않으니 말이다. 


9. 사실 위의 주저리주저리 헛소리를 걷어내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 


“지하철 안내 방송은 노동조합이 하면 좋겠다. 평소에는 공사가 다 하잖아.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노동조합이 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바를 마음껏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허황된 생각이지만, 생각은 자유 아니겠는가!


10. 부록: 시민교육 과제 샘플


"같은 길이의 안내문을 서울교통공사 노동조합이 작성한다면 어떤 문장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파업의 이유에 대해 다각도로 조사하고, 노동조합의 핵심 요구를 요약하고, 이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와 표현을 최대한 나열하고, 이들을 적절히 엮어 안내방송 문구를 PPT로 제작하라. 그렇게 정리한 이유를 2-3단락의 줄글로 작성하라. 마지막으로, 해당 멘트를 음성으로 녹음하고 PPT 파일과 통합하여 동영상 파일로 제출하라."


* 몇몇 분들께서 '파업'이 아닌 '태업'으로 들으셨다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저는 '파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겠네요. 이 글은 하나의 분석 예시로 봐 주시고, 방송 멘트는 정확한 전사가 아님에 유의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비판적미니담화분석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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