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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Jan 04. 2018

영어는 인풋이다? - 첫 번째 이야기

- 영어학습의 지배적 패러다임 '인풋' 다시 보기

한국 영어교육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단연 '인풋(input)'입니다.


“영어학습은 딴건 필요없어. 인풋을 늘려야지.”

“무조건 많이 들어. 그래야 늘어.”

“공부하려고 하지 말고 노출을 늘려야 돼.”


이런 이야기 한번 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여기에 담겨 있는 게 바로 ‘인풋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생각이죠. 영어는 영어로 배워야 하고, 영어에 많이 노출(exposure)될수록 영어를 잘하게 되며, 다른 길은 없다는 요지입니다. 


이에 따르면 수업시간에 한국어 사용은 최대한 지양해야 합니다. 대학의 전공과목 또한 영어강의로 진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듣고 있으면 언젠가 소리에 익숙해지면서 귀가 뻥 뚫리는 마법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이들 주장에 대해 어느 정도 논란이 있지만, 외국어 학습에서 언어입력(input)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기타를 직접 쳐보지 않고 기타를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 물에 들어가지 않고 수영을 배울 수 있다고 우길 순 없으니까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인풋’이라는 건 내가 배우려고 하는 언어 자체입니다.

언어를 배우는데 있어 언어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에 반기를 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니까요.


그렇다면 외국어 인풋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까요? 다량의 인풋은 영어학습을 위한 필요충분 조건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한국 영어학습의 초특급 키워드 인풋(input)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Photo by Amador Loureiro on Unsplash


인풋, 언어이해 그리고 배경지식


외국어 학습에서 외국어 인풋의 중요성은 누누히 강조되지만 한국어 배경지식이 갖는 중요성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듯합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1. 어떤 언어이든간에 언어는 혼자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지식의 기반 위에서 돌아갑니다. 


2. 한국인이라면 대부분의 경험과 지식이 한국어로 구성됩니다. 


따라서 외국어를 읽고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국어 지식과 함께 세계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어떤 언어를 공부하든 다양한 지식의 습득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박상을 입으면 상처가 남듯이 모든 경험이 모국어로 구성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의 경험은 한국어로 표현되고 공유되며 체계화됩니다. 우리말은 우리의 경험 곳곳에 스며있습니다.


일상에서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한국어 자막의 효용일 것입니다. 그냥은 잘 들리지 않던 뉴스 혹은 드라마도 한국어 자막과 함께 보면 이해되는 경우가 많죠. 


이는 외국어의 소리가 그 자체로 청자에게 전달된다기보다는 (주로 한국어로 된) 배경지식과 상호작용하며 뇌에서 처리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종종 털어놓는 걸 보면 저 혼자만의 경험은 아닌 듯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국어와 외국어의 상호작용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영어 인풋을 이해하는 데 풍부한 배경지식이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신경언어학의 연구는 사춘기 이후 외국어를 처음 배웠을 경우 모국어(L1)와 외국어(L2)가 사뭇 다른 '회로'와 활성화 패턴을 통해 처리됨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국어 자막이 외국어 이해에 실시간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다수의 경험은 모국어와 외국어가 엄청난 속도로 상호작용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언어능숙도와 자막의 효용


다만 엄밀한 연구를 위해서는 학습자들이 자막을 켜고 영상을 볼 때 '들린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어디까지가 실질적 이해이고 어디까지가 '이해했다는 착각'혹은 사후적 합리화인지 밝혀내야 하는 과제가 남습니다.


예를 들어 저와 같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능숙한 학습자가 영미권 드라마를 볼 때엔 다음을 가정할 수 있겠습니다.


1. 영어 구어체에서 사용되는 어휘적, 문법적 패턴에 익숙하다. 즉 해당 언어의 일상어(colloquial language) 전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


2. 드라마의 전개상 해당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대략적인 파악한 상태다. 기존 스토리라인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추측(inference)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3. 드라마의 소재가 특이하지 않다면 해당 대화에서 나올 수 있는 대략적인 어휘 집합(lexical sets)에 대해 배경지식을 갖고 있다. 이는 드라마의 내용과 연관된 어휘지식에 해당한다.


4. 드라마 시즌의 후반부를 보고 있다면 이전 에피소드들을 통해 주요 인물들의 발음 및 대화 패턴을 암묵적으로 익힌 상태다. 이는 각각의 인물의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상황에서 자막을 켜고 볼 때 필자의 뇌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언어 능숙도에 따라 뇌의 여러 부위는 어떤 활성화 패턴을 보이게 될까요?

전문적인 내용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 영어 자막의 효용은 어디까지일까요?


이런 주제로 깊이 있는 연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연구 결과를 근거로 "자막 금지"나 "무조건 자막 끄고 5번 이상 보세요"보다 나은 설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그래서 자막은 어쩌라는 겁니까?


이쯤에서 이 질문을 하시는 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막 사용 여부를 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집중력의 한계, 동기 수준, 가용 학습시간 등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크게 두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1) 학습의 목표가 소리에 익숙해지는 데 있다면 자막을 끄고 반복해서 청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2) 하지만 영어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자막을 활용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겠죠. 


전자가 언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상향식(bottom-up) 정보처리에 중점을 둔 공부라면 후자는 하향식(top-down)에 방점을 찍는 방식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언어 이해에서 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메커니즘인데, 추후 별도의 포스팅을 통해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막을 무조건 끄고 보아야 한다는 원칙에 매달리다가 영어학습에 대한 동기가 급속히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려고 이걸 자막도 없이 보고 있나?"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으시다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영어를 배울 때 이 두 가지 모드를 혼합하여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결론적으로 자막을 꺼야 인풋이 많아지고, 인풋이 많아져야 영어를 더 빠르게 배울 수 있다는 조언을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영상으로 영어공부를 하려고 하는데자막 끄고 봐야 돼? 켜고 봐야 돼?"라는 질문을 가지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인풋은 언어학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인가?"를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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