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의 책임

[챕터 1] 혈혈단신 교내에서 살아남기

by 진아


열정과 의욕이 넘치던 시기에 저는 주로 도시락을 싸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열정과 의욕은 넘치지만 실천력도 없고 부지런한 편도 아니어서 도시락이 그렇게 알차진 않았지만 말입니다. 공중제비를 돌며 등교한 것도 아닌데 가방 안에서 옆구리가 터지고 새카맣게 변해버린 바나나, 학교에 오기 전 대충 찢은 후 락앤락 통에 구겨 넣은 양상추, 며칠째 식탁 위에서 뒹굴던 삶은 고구마, 작은 소스 통에 담은 발사믹 소스 같은 게 주요 메뉴였습니다.



다이어트를 한 거였냐고요? 슬프게도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같아서는 저도 휘황찬란한 도시락을 싸고 싶었어요. 도시락을 준비한 날이면 학생 식당이 어찌나 커 보이던지. 큰 학생 식당 구석에 앉아 혼자 가방을 주섬주섬 열어 도시락을 꺼내 먹는 사람이더라도 위엄은 (메뉴에서) 갖추고 싶었습니다. 내일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품위로, 주변에서는 온갖 양념과 찌개와 볶음과 튀김과 무침의 냄새가 진동을 할지라도 나는 한 밀폐용기의 도시락을 꺼내 먹겠소.



유튜브에 비건 도시락이라고 영어로 검색해보면 얼마나 다채롭고 아름다운 음식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지 모릅니다. 언제부터 휴대폰에 냄새 전달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나 싶게 휴대폰 액정 너머로 방금 삶은 강낭콩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병아리콩과 토마토, 오이를 넣고 새콤한 소스에 버무린 샐러드. 마리네이드 토마토와 바질 페스토를 넣은 냉파스타. 피타 빵 사이에 후무스, 마른 채소, 아보카도를 썰어 넣고 아가베 시럽을 뿌린 샌드위치. 저 잠깐 침 좀 닦고 올게요.



이 침은 맛있는 걸 떠올리느라 군침이 돌아 흘리는 침이기도 하지만 입을 벌리고 늦잠을 자다가 입가에 줄줄 흐른 침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무척 게으르고 비건은 보통 부지런할수록 기쁨이 넘치는 식사를 할 수 있거든요. 어느 날은 팔자에도 없는 삶은 고구마(팔자에도 없다는 건 철저히 제 소망입니다)를 도시락으로 먹고 있었습니다. 곁들이는 음식이나 양념 하나 없이 껍질이 덜 까진 고구마를 입안에 쑤셔 넣었죠. 잘못 삼킨 건지 고구마가 무지하게 퍽퍽했던 건지, 그도 아니면 먹기 싫어 미적거리면서 삼키느라 그런 것인지 목에 고구마가 걸려서 켁켁거리다가 문득 서러워졌습니다. 남들은 방금 대량 조리된 따뜻한 음식을 삼사천 원 내고 받아먹는 동안 저는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기에 다이어트하는 사람처럼 고구마를 한 입마다 백 번씩 씹어가며 삼켜야 하는 걸까요?



제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전생이나 내세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번 생에 있을 겁니다. 저조한 출생률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매번 아이 한 명을 낳고 기르는 데 드는 돈이 얼마큼인지가 언급됩니다. 아이 한 명이 성인이 되기까지 드는 비용에는 단순히 금전적인 부분만 있지 않을 겁니다. “내가 살아 있어서 뭐해. 산소만 낭비하는 놈인걸.”하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자조적이어서 어쩐지 반성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건 정말 의미 있는 일이지만 아침에 일어나 물을 마시는 것부터 잠을 자는 것까지 삶을 영위하는 모든 활동에서 나는 타자를 착취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놈이지.”하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희망차게 시작하였는데,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데도….



김초엽 작가의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는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과학이 진보하고 사회가 발전해도 매번 남겨지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이라고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문장에서 얼마나 먼가요?



특급배송과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의 달콤함을 배신하고 하루에 두 번 도착하는 마을 버스를 타기 위해 2시간을 걸어야 하는 동네로 훌쩍 떠나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을 공동체의 양육 같은 걸 이야기하는 것은 순진하다 못해 멍청하게 들릴 이야기라는 걸 압니다. 나를 먹이고 키운 자연에 감사하는 것보다 대량 수확을 가능케 한 농업 기술의 발전에 건배를 하는 것이 더 그럴싸한 시대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다만 저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저의 몫을 곱씹어봅니다.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산 것은 아닐지라도 어쨌거나 저는 이렇게 살아남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제 몸은 역겨울 정도로 켜켜이 다른 동물의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알아버렸어요.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세상은 천천히 멸망으로 향하는 중이라는 예감이 제 마음 속엔 언제나 잔잔하고 굳건한 형태로 자리잡아 있습니다. 저는 이 멸망행 급행열차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우주의 시점에서 아주 빠르게, 작은 나의 시점에서 아주 느리게 열차가 운행 중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퀴벌레 양갱을 나눠 먹는 것뿐일까요?



당장 제가 동물을 섭취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극적으로 변하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평생 동물을 섭취하지 않고, 동물로 만든 옷을 입지 않고, 동물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는 제품 소비를 자제하고, 최대한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세상은 하나도 바뀌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다정함도 이해도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매번 무언가 달라졌고 전보다 나아졌다고 착각하는 것뿐이라고요. 만일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곤 온통 그런 것뿐이라면 사람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우리는 왜 살아내야 할까요? 저는 삐딱한 편이어서 노력과 시도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해하려는 노력과 이해하려는 시도 같은 것들이 지겹습니다. 선한 의도와 따스한 마음씨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기에는 웃으며 배에 칼을 꽂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게 도움인 줄 안다니까요? 네가 그렇게 아프다니, 너를 위해 내가 너를 서둘러 죽여주지! (저기요, 저는 한참을 더 살고 싶은데요.)



저는 우리의 시도가 다정함이 아니라 괴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죄의식 같은 것이죠. 멍하니 천장을 보는 김혜수 배우의 짤처럼 “죽겠어요.” 하지만 어떡하겠나 싶어요. 저에게는 해야 할 공부가 있고 쓰고 싶은 글이 있고 사랑할 사람이 있어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인걸요. 저는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적어도 당분간은 살아 있을 사람으로서 제가 지닌 책임에 관해 생각합니다.



언젠가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가서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사장은 왜 동물을 섭취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서요.” 사장은 제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는 뭐든 너무 많이 먹었습니다. 너무 많이 만들어서 너무 많이 사놓고 너무 많이 버렸습니다. 너무 많이 지었으며 너무 많이 부쉈고 너무 많이 사용했으면서 이야기는 거의 나누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들은 이야기하지 않아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도 아예 없는 일은 아니어서 자꾸만 저에게 말을 건넵니다. 저는 정의감에 불타기엔 지쳤고 누군가를 연민하기에는 이기적입니다. 대의를 위해서 즐거움을 희생하는 법도 모릅니다. 세계의 평화를 빌기엔 제 마음의 평화를 다스릴 줄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버렸어요. 이야기는 잔인하고 아름다워서 전부 기억하지 못해도 꼭 마음에 담겨서 걸을 때마다 출렁거립니다. 그런 이야기쯤이야 화단에 뿌려버리면 그만이죠. 그렇지만 언젠가 제가 건넨 이야기도 어디선가 이렇게 겨우 수평을 유지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가득 담긴 물은 조금씩 흐르고 언젠가 그마저 다 마를지 모르지만 그 전까지는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을 수도 있겠죠.



지옥은 이미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는 저의 태도를 정할 뿐이에요.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20, 181-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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