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혈혈단신 교내에서 살아남기
저는 햄버거를 무척 좋아합니다. 햄버거는 물론이고 샌드위치, 타코, 피자까지. 빵 속에 소스 범벅인 채소가 잔뜩 들어 있는 건 뭐든 좋아요. 쌈*을 입안 가득 넣고 와구와구 씹어먹는 것을 사랑하거든요. 빵이라는 평등한 장에서 모든 채소가 제 역할을 하며 소스로 연결되어 하나의 완벽한 조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데요. (시각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테지만요) 쌈이 한국인의 식사 방식이라고 누가 그러던가요? 쌈은 인류의 핏줄에 흐릅니다. 우리는 쌈의 민족이 아니라 쌈의 종족인 것이죠.
채식주의자가 햄버거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깜짝 놀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글쎄, 단어 ‘햄버거’가 햄과 버거를 합친 게 아니라니까요? ‘햄버거’의 어원은 독일 도시 함부르크의 지명이라고요. (햄버거가 합성어라면 '버거'는 어디서 왔는지 해명이 필요하다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죠) 그러니 반드시 햄버거에 동물성 재료가 들어갈 필요는 없다니까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씨알도 먹히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햄버거는 스테이크에서 유래했으며 어쩌고저쩌고…. 언제부터 햄버거의 기원과 역사를 엄밀히 구분하며 식사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떤 음식점을 가도 벽에 재료의 효능과 역사를 써두는 사람들답게 햄버거에도 전통과 규율이 필요한 걸까요? 엄격하고 진중하고 성스러운 햄버거-섭취-의식에 비건이 개입하는 것은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장에 에리스가 등장한 사건쯤 될 테죠. 그렇지만 페미니스트는 언제나 킬조이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듯이(에리스는 불화의 신이 아니라 페미니스트인 게 틀림없어요), 폭력으로 쌓아올린 문명을 마구 흐트러뜨리는 일에 전통과 순응을 바랄 수는 없는걸요. 《졸업》에서의 낭만적인 결혼식장 난입 이후 남은 것은 불투명한 미래와 흔들리는 눈동자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런 짐작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닐지도 몰라요.
햄버거가 고대 로마 음식에 기원을 두든, 몽골 기마 민족의 식사나 함부르크 지방의 스테이크가 시초이든 채식주의자가 햄버거를 먹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햄버거를 먹는 일 자체야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햄버거를 먹는 법 - 1. 입을 연다. 2. 햄버거를 넣는다. 3. 입을 닫는다.) 눈에 보이는 햄버거집을 무작정 들어간다면 햄버거를 먹기 어렵습니다. 최근에는 롯데리아에서 비건 버거를 두 종류나 출시하였기 때문에 롯데리아가 있다면 웬만해서 굶지는 않을 수 있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 이전까지 패스트푸드점은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가던 유럽인들이 햄버거의 시초 격인 음식을 먹었다는데, 어쨌거나 그들에게는 햄버거라 부를 만한 것이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민 행렬에 낀 작은 비건을 생각해보세요. 너 임마, 내가 편식하지 말고, 어? 축산업자들의 피 땀 눈물 앞에서 으데 감히 말이야, 찬 밥 뜨신 밥 가릴 때야, 어? 존엄을 위해 존엄을 희생하거나 타협해야 하는 삶에 관해서요.
햄버거를 먹지 않더라도 패스트푸드점에 갈 수는 있겠죠. 시장에 가면 사과도 있고, 두부도 있고, 고추장도 있고, 대파도 있고, 어쩌고 저쩌고 다 있듯이 패스트푸드점에 가면 (동물성 패티를 넣어서 만든, 그렇지 않더라도 아무튼 왜인지 동물성 성분을 꼭꼭 함유한) 햄버거도 있고, 치킨도 있고, 강정도 있고, 너겟도 있고, 치킨랩도 있고, 치즈스틱도 있고, 아이스크림도 있고, 어, 그러니까… 뭐가 있더라… 감자튀김과 콜라가 있습니다.
C대학 내에는 롯데리아가 없고 맥도날드만 있습니다. (이 글을 쓸 당시에는 교내 햄버거 가게에서 비건 메뉴를 판매하지 않았어요) 정문에서 역을 향해 조금 걷는다면 롯데리아에 갈 수도 있지만 롯데리아는 밤이 되면 문을 닫습니다. 반면 맥도날드는 24시간 운영하는데다 학교 내부에 있어 다른 학교 건물과 가까운데 말이죠. 모두가 일찍 잠자리에 드는 새나라의 동네인 건지 24시간 카페를 찾다 보면 새벽이 오는 흑석에서 24시간 운영하는 가게는 무척 매력적입니다. 그러니 맥도날드에 갈 수밖에요.
물론 맥도날드는 미국 소비주의 문화의 정점에 선 대기업입니다. 참깨빵 위에 순쇠고기 패티 두 장 특별한 소스 양상추, 치즈 피클 양파까아지 모조리 동물과 인력을 착취해 만들어졌습니다. 빅맥을 팔아서 세계를 정복하려는 것처럼 온세계 곳곳에 지점을 세우는 맥도날드의 야망을 모르는 척 로널드 맥도날드 씨는 미소 짓습니다. 빅맥지수 따위가 존재하는 걸 보면 맥도날드의 세계 정복은 이미 이루어진 지 오래인 것 같네요. 부의 불균형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부의 불균형에 크게 기여한) 미국 자본주의 시장 탑티어 그 놈…. 그의 얼굴은 질 나쁜 재료의 맛을 감추는 빅맥의 특별한 소스처럼 프랜차이즈 대기업의 대량 소비, 대량 낭비, 대량 착취 체계를 감춥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는 프렌치 프라이와 콜라를 잔뜩 시켜서 먹습니다. 동물 소비의 선두주자나 다름없는 맥도날드와 코카콜라의 제품을 구매해 즐거움과 만족을 느끼다니! 인류세의 화석은 코카콜라 페트병이라던데요. 아무리 인류가 새로운 시대를 맞은 듯 자만해도 인류의 설명은 알타미라 동굴 벽화의 전언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죠.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을 설명할 것입니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라고는 소에 대한 책임과 죄의식마저 대기업에 맡겨버리고서 예술과 문명은 고상한 영역인 듯 구는 태도뿐이겠네요.
게다가 패스트푸드점은 푸드만 패스트인 것이 아니잖아요. 드라이브 스루 같은 주문 절차부터 시작해서 포장재까지 일회용품 천지인걸요. 그야말로 패스트-생산을 통한 패스트-섭취로 패스트-오염과 패스트-멸망을 부추기는걸요. 그 전과정 구석까지 촘촘히 벌어지는 패스트-착취쯤이야 퓰리처상 사진전을 보며 패스트-연민한다면 내 삶의 안정성에 대해 패스트-안도해도 되는, 나와 무관한 일인 거니까요. 그렇게 믿는다면 그런 것이겠죠? 아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네 몸과 같이…)
대개의 소비는 착취적인 지점이 있으니 비윤리적인 소비를 지적하는 것은 무척 쉽고 간단하며 때로는 즐겁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안적 선택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새로운 옵션 없이 ‘고르시오; 프렌치 프라이 VS 끝나지 않는 허기와의 싸움’이라는 선택지가 나타난다면 말이죠. 왜 끝없는 허기 속에서 몸부림치는 대신에 방금 튀겨 바삭하고 기름진 튀김을 한 입 베어 물면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포슬포슬한 감자와 소금이 한데 어우러지며 입안을 감싸는 감자튀김을 먹느냐고 물으신다면 말이죠.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건가요?
시험 기간 중 맥도날드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습니다. 당신의 낮이 제 낮과 큰 차이가 없다는 가정 하에 말이죠. 영화 <코코>의 영혼들은 축제를 열지만 맥도날드의 영혼들은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피로를 수시로 떼어내고 돌돌 말아 코카콜라와 함께 간신히 삼킵니다. 저의 영혼은 자꾸만 몸을 빠져나가 저 먼 세계 어디쯤으로 떠납니다. 이효석은 러시아 예술에 진정한 아름다움의 근원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가치관이 그의 작품에 반영되어 인물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블라디보스토크… 좋겠다… 지금쯤 무지 춥겠지… 패딩을 껴 입어도 찬 공기가 살갗에 닿는 기분일 거야….
감자튀김을 입에 넣고 씹어 먹을 때 저의 영혼은 비로소 현실로 돌아옵니다. 무당처럼 굿을 하는 셈이죠. 다만 그(물론 감자튀김 말입니다)가 자애롭게 저의 미련을 해소해주고 저의 영혼이 세상을 떠나도록 해주는 역할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이제 좀 이 세계를 떠나겠다고 아우성인데,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제 영혼을 현실에 붙들어두는 무당입니다. 감자튀김을 우적우적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머리가 지끈거릴 때까지 마시면 당장 네 시간 뒤에 기말고사가 있으며 아직 시험 범위의 절반도 채 공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마주합니다.
시험기간이 되면 며칠 동안 두어 시간만 잔 탓에 탈부착 영혼의 벨크로가 엉망이 된 상태이므로 조금만 방심하다가는 책상에 머리를 박을듯 고개를 숙입니다. “하늘에 계신 감자튀김의 신이시여, 제가 감자나 튀김이나 감자튀김을 위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익은 벼처럼 숙인 제 고개를 보고 저를 위해 무언가를 내려주세요. 이왕이면 A+를, 그게 어려우면 따뜻한 감자튀김이라도.”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감자튀김은 금세 눅눅히 식어버립니다. 한 조각 들면 케첩에 푹 절어서, 기도하는 거라고 우기는 제 고개만큼 힘없이 대롱거려요. 감자는 이제 퍽퍽하기만 하고 튀김은 물먹은 스펀지처럼 말랑합니다. 그러면 저는 감자튀김 꽁다리만 골라서 주워먹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저는 갓 구운 감자튀김은 갓 구운 대로, 식은 감자튀김은 식은 대로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브로콜리너마저’가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다고 노래한 것처럼, 안 돼요, 식어버린 감자튀김을 다시 튀길 순 없어요. 모두가 그렇게 바라고 있다 해도.
* 피자가 왜 쌈이냐고요? 저는 엄청나고 굉장한 방법으로 그 사실을 증명해냈으나 여백이 부족하기에 여기 적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