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당근을 골라 내고 만화영화를 보면서 살 것 같아."
〈번개전사 그랑죠〉*의 주인공 ‘장민호’는 당근을 싫어한다. 당근을 보고 질색하는 장면을 보자마자 나는 〈번개전사 그랑죠〉를 좋아하게 되었다. 왜냐고? 나도 당근을 싫어했으니까. 사람은 참 단순하다. 단 하나. 단 하나만이라도 자신과 비슷한 부분이 있으면 바로 사랑에 빠져버리니까. 상대가 나보다 연상이든 연하든 상관없이. 설령 그 상대가 이성(異性)이더라도. 심지어 실존인물이 아닌 2D 캐릭터라 해도 사랑에 빠져버리니까.
나뿐 아니라 그 당시 많은 아이가 이 작품을 좋아했던 것 같다.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체육…이 아니라 ‘즐거운 생활’ 시간만 되면 아이들은 발 옆부분을 직직 끌며 운동장에다가 그랑죠를 소환하는 마법진을 그려댔다. 이 기억 때문에 〈그랑죠〉가 1995년이나 1996년 즈음에 방영되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비디오는 1990년대 초에 발매되었고 당시 서울방송이었던 SBS가 1993~1994년에 〈번개전사 슈퍼 그랑죠〉라는 제목으로 방영했다고 한다. 무려 작품이 끝나고도 이 년이나 지난 뒤였는데 아이들은 여전히 ‘그랑죠’를 추억하며 놀았던 것이다. 뭐, 그때는 비디오 대여점이 워낙 성행하던 시기였으니까 그 후로도 꾸준히 비디오를 빌려 봤을지도 모르고. 여하튼 이 작품이 나를 포함한 그 시절 어린아이들의 마음에 팍 꽂히는 지점이 분명 있었던 듯하다.
뭐니 뭐니 해도 〈그랑죠〉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고르라면 저 그랑죠 소환 신이 아닐까? 1989년에 첫 방영된 작품(나랑 동갑!)이니 어느덧 방영된 지 삼십 년 넘게 지난 셈인데, 여전히 여전히 예능이나 유튜브 등에서 무언가를 소환하는 장면이 나오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환 신을 연출한 이들이 굉장한 베테랑이다. 일단 이 장면만을 연출한 사람은 후쿠다 미츠오(福田己津央) 감독이다. 그가 감독을 맡아 연출한 작품으로는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시리즈와 〈기동전사 건담 SEED〉와 〈기동전사 건담 SEED DESTINY〉 시리즈가 있다. 작화를 그린 사람은 아시다 토요(芦田豊雄)인데, 이 역시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으로, 이 원고에서 다룰 〈시간탐험대〉와 〈세느 강의 별〉〈이겨라! 승리호〉〈요술공주 밍키〉의 작화를 담당했다고 한다. 음악감독은 다나카 코헤이(田中公平)다. 그 역시 이 책에서 다룰 〈절대무적 라이징오〉와 〈사자왕 가오가이거〉, 애니메이션 〈원피스〉에다가 여기서는 이야기하지 않지만 내가 보고 자랐던 슈퍼전대 시리즈 중 〈바이오맨〉과 〈후레쉬맨〉〈마스크맨〉의 노래를 전부 만들었다고 하니… 최정예부대라는 느낌이랄까? 이 정도 인력들이 뭉쳤으니 당연히 아이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지, 싶다.
개인적으로는 〈그랑죠〉의 노래 중에서 작중 등장인물 ‘구리구리’가 부르는 ‘당근송’에 각별한(?) 추억이 있다. 2000년대 초중반, 오타쿠 여자애들(!)이 노래방에서 자신의 귀여움을 어필하고 싶을 때 선곡하는 노래 BEST 3을 꼽는다면 못해도 ‘당근송’이 2위는 할 것이다. 참고로 3위는 이정현의 〈줄래〉, 1위는 SKOOL(스쿨)의 〈Julian〉이라고 이 연사 힘차게 주장해봅니다. 물론 이 순위에 있는 곡들을 나 또한! 귀여움을 어필하려는 의도로 부르곤 했… 다….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 앞 부분은 또렷하게 기억나서 지금도 부를 수… 있… 다….
일본 내에서 인기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닌데 〈마신영웅전 와타루(魔神英雄伝ワタル)〉**라는 만화영화에 밀린 비운의 작품이다. 사실 ‘비운의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두 작품의 제작진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마신영웅전 와타루〉와 〈번개전사 그랑죠〉 둘 다 이우치 슈지(井内秀治)가 총감독을 맡았고, 캐릭터 디자이너와 편집, 미술 감독, 촬영 감독, 음향 감독까지 똑같은 인물들이 담당했다. 〈와타루〉가 성공적으로 방영된 후 그 후속작으로 〈그랑죠〉를 제작했는데, 완구 판매량이 〈와타루〉보다 적어서 조기 종영한 뒤 〈와타루〉의 후속 시리즈를 만든 것이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 애니메이션 제작은 완구 판매에 큰 영향을 받는 듯하다. (이 사실이 인터넷상에서 와전되어 망했다는 오명을 쓴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와타루〉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그랑죠〉만큼의 인기는 끌지 못했다. 〈세일러 문〉과 〈웨딩피치〉의 관계랑 비슷했다고나 할까? 〈세일러 문〉의 아류작인 〈웨딩피치〉가 먼저 국내에 들어와 인기를 얻었던 것처럼, 〈그랑죠〉 역시 〈와타루〉보다 먼저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후일 소개된 〈세일러 문〉은 〈웨딩피치〉보다 더 크게 히트했지만 〈와타루〉는 그러지 못했다는 점 정도랄까.
여하튼 〈그랑죠〉는 일본 내에서도 나름 인기 있는 작품이다. 그 인기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지. 정말 망했다면 지금처럼 〈그랑죠〉의 액션 피규어와 프라모델이 그렇게 많이 만들어지고 팔릴 리가 없다.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선라이즈에서 실시한 ‘상품화를 희망하는 작품 앙케이트’에서 〈그랑죠〉가 1위를 차지하여 2011년부터 제작된 것이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21년에 발매되었던 모데로이드(MODEROID) 프라모델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더 인기 있는 작품답게 예약 판매만으로도 2000여 개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놀랐다나 뭐라나. 나 역시 갖고 싶었지만 너무 비쌌고… 지금까지 ‘나 사실 〈그랑죠〉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았잖아’라며 신 포도만 열심히 먹고 있는 중이다.
아니다, 그래도 난 역시 〈그랑죠〉에 등장하는 인물과 로봇 들을 좋아했다. 로봇을 소환하는 장소에 조건과 제약이 있는 것이 신선했다. 가령 ‘그랑죠’는 땅에서만 소환할 수 있는데, 그 땅도 두 다리를 딛고 설 수 있는 곳이라야 한다든가, ‘포세이돈’ 역시 물이 있는 곳에서만 소환이 가능해 바다처럼 파도 치는 물은 안 되고 온천은 된다든가 하는. 그런 제약 속에서 융통성 있게 상황을 만들어내 로봇 소환에 성공하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였다. 이런 특이한 설정들이 우리가 이 만화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
만화영화를 보느라고 텔레비전을 끼고 살던 나답게(그러니까 이런 글도 쓰고 있겠죠?) 〈그랑죠〉 마지막 화도 봤었다. 마지막 화에서 당근을 싫어하던 민호가, 지구로 돌아가는 우주여객선의 기내식에서 나온 당근을 먹는 모습이 가장 인상 깊게 남았었다. 하지만 민호야, 누나는 아직도 당근을 편식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단다. 아마도 평생을 그럴 것 같아. 평생 당근을 골라 내고 만화영화를 보면서 좋아하는 로봇을 사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살 것 같아.
* 원제는 〈마동왕 그랑조트魔動王グランゾート〉이다. 나는 비디오판인 〈번개전사 그랑죠〉로 처음 이 작품을 알게 되었지만, SBS에서 방영했던 제목 〈번개전사 슈퍼 그랑죠〉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 우리나라에서는 〈슈퍼 씽씽캅〉(…)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 이에 관련하여 좀 더 정확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저의 전작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들녘, 2022)를 참고해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