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과 탄핵가결이후 나는…?)
2024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윤석열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 국민들이, 여러 역사속으로 스러져간 민중들이 일궈온 민주주의를 명백히 땅바작에 처박았고, 자신은 그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 듯 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윤석열이 미친 결정을 내렸고, 그가 미쳤으며 정신이 나갔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미친 나는, 내가 윤석열과 같은 라인에 서서 미치광이라는 수식이 붙는 것이 우스울 따름이다. 윤석열의 비이성적 행태에 대해, 다수의 사람들이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 태도를 이르며 그에게 미쳤다는 말로 이 모든 행보를 갈음하려 했을 때, 나는 비단 이 시국이 단순히 윤석열에 대한 탄핵으로 이어져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사적 흐름이 되리란 것에 경계하게 되었다.
그것은 비정상적인 행태에 대해 뭇 사람들이 너무 쉽게 채택하는 미쳤다는 단어와 관련이 있으며, 실상 윤석열이 계엄령 선포를 내린 것을 비롯 집권기간동안 행한 일련의 정치를 살펴봤을 때, 이 위태위태한 시국에서 언제 비상이 터질지 알기 어려웠던 것은 우리 모두가 주지하고 있었던 바라고 본다. 처음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쓰고 나왔던 때, 바지를 반대로 입고 나왔던 때, 유석열이 기행을 보인 일은 한 두번이 아니다. 전형적으로 남들이 하면 광증, 자신이 하면 선구안이 있는 행위라 생각하는 모양인 그 윤석열.
나는 심지어 윤석열을 직접 본 적도 있다. 그 자리에서 몇 가지 주의를 받았는데 가장 중요했던 건 화면에 잘 나오도록 다리를 꼬거나 움직이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 VIP께 질문을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윤석열은 시작 시간보다 엄청나게 늦었다. 옆에는 그 (지금 이름이 잘 알려진)경호 팀장이니 비서를 끼고 한 시간 쯤 지나 도착 한 뒤 앵무새처럼 사람들의 발표를 읽었다. 가장 시간이 많이 할애된 것은 악수 시간이었다. 윤석열의 손은 축축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았다. 순간적으로는 ‘왕王 자는 네임펜으로 썼나보군.’ 같은 생각이 들었고,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간 뒤 담배를 피웠다. 그 자리엔 한동훈도 왔다. 텔레그램으로 메세지 폭탄을 보내는 것이 요새 시위의 한 방법이기도 한 모양이라, 끄트머리에 그의 명함을 첨부하겠다.
이제 윤석열은 칭제건원도 거리낌 없이 자행하려는 속내를 드러냈다. 수 많은 시민들, 그중엔 나의 동료도있고, 친구도 있으며, 지인들도 많다. 이들이 앞장서 시위를 나가고,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탄핵을 요구하는 이 시위에서, 다른 정치세력에 속한 이들은 하나의 큰 집합으로 묶이게 된다. 이는 이미 박근혜 탄핵 시위 집회 때에 목격된 바 있다. 그리고 그 시위는 어떻게 끝났는지 사람들은 기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의 목소리를 낸다. 지금의 상황이 불의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면서 평범하게 누려온 것이라 함은, 우리가 그것을 행해오면서 지켜왔다는 반증도 된다. 사람들은 모이기 시작했고, 나는 한동훈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스팸 메시지처럼. 사실 내게 오는 문자의 절반이 그렇고 그런 류이다. 중국 홈쇼핑에서 개인정보가 팔렸겠지.
[국제발신]
본인은 이번주 토요일 밤에 같이 밤을 보내고 싶어요 여의도//사진은 라인으로 볼수 있어요 d7hcwq
[국제발신]
동훈님 저랑같이 죄를씻으실래요? 제가 모실게요. 국회의사당ḺḻṈE: te2930q1q
[Web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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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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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발신]
사람많은데 좋아해요 주말시간많아요 같이시위해요 우선 사진보시고 라인:kq85d3qq
그들은 꽤 이런 일이 익숙한 듯했다.
그러니까, 허황될 정도로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는 것, 투자처는 미정인 것, 무엇을, 누구를, 어떤 대상을 겨냥하는 정책인 것은 모두 두루뭉술한, 그저 내가 나랏돈을 이만큼 풀 것이다, 호언장담하고 좌중의 박수를 받는 것…. 분명 누군가는 이러다 저 가속하는 법을 잃어버린 바퀴가 자동차를 엎을 것으로 판단했겠지만, 말리지 못한 채 그들은 조용히 사라졌을 것이며, 나는 이들에게도 책임을 묻는다. 물론 여기에는 당연히 나도, 해당이 된다.
윤석열이 어떤 얼굴이었고,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정신질환’ 정책에 돈을 붓겠노라고 과시하는 자리였음에 구체나 세부를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참 편해 보였다. 그 자리에는 명목상으로 참여한 나, 라든지 문화예술 종사자나 활동 단체 등도 있었고, 사실 나도 버스를 타서 VIP라는 수상쩍은 호칭을 듣기 전까지 그저 청와대의 건물 하나를 빌려 여는 정책 토론회에 초청받은 것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순진한 착각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미쳤다를 넘어 윤석열이 망상장애에 빠진 것이 아닌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인지 기능을 비롯해 뇌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나는 궁금하다. 윤석열. 나에게 있어서 그는 다분히, 더할 나위 없이 정상이다. 윤석열의 욕망이 비뚤어져 있음은 대선을 치를 때, 아니 그 전부터 익히 알고 있지 않았나? 단 며칠 동안 윤석열이 특별히 유 헤드 빙빙 같은 상태 이상이 되어 저지른 일이 아니다.
나는 윤석열에게 감히 ‘미쳤다’는 말을 빼앗길 수 없다. 수십만에 달할 정신질환 환자들이 싸우고 있는 ‘미쳤음’과 미치지 않았음의 경계를 윤석열로부터 나누려는 지금의 움직임에 조금의 성찰을 요구한다. 특히 윤석열의 행동을 분석해서(카메라 밖과 안의 윤석열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에게 몇몇 정신질환 진단명을 부여하거나, 이를 통해 접근하려는 움직임은 위험하다.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의학 정보 지식만으로는 윤석열의 심리와 정신상태를 분석할 수 없으며, 사실 분석할 이유도 없다. 의학적으로 심신미약 상태라고 말해질 수 있겠지만, 사람들이 더 많이 윤석열이라고 불리는 자에 대해 의학 정보를 보태줄수록 차후 여론전에서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사람들의 눈에는 계엄을 비롯한 담화 및 이후의 행보들이 정신 나간 행동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저들의 노말이며, 권위와 힘으로 찍어내리면 옳게 되는 매직이다. 그들만의 정상성이다. 이 모든 단체, 이 모든 시민, 이 모두가 개탄하며 윤석열을 정신병자나 정신이 돌았다는가, 알코올 치매라고 말하든가, 망상 장애가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런 질병의 징조를 보이는 것과 별개로, 윤석열의 언동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그저 불리한 판세일 때 설설 기는 방법을 알고 있는 여타 정치인들과 같이!
왜 그를 광인 취급하는가? 정신병자나 정신장애가 가진 사고능력의 열화, 비이성적, 충동적, 수습불가…그런 것들과 관련하기 때문에? 절대 아니다. 윤석열이야말로 다분히 정상적이며, 한국 사회의 노말이자 토종 아닌가? 윤석열의 계엄령에 유달리 ‘미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이해한다. 하지만 정말로 오늘도 약물을 삼키며 이 요동치는 시국에서 뉴스를 끊임없이 확인하며 ‘더’ 미치지 않으려 애쓰는 정신병자도 있다. 그리고 이들도 탄핵, 내란죄 등 규탄 시위에 참여한다. 군중 속과 거대한 소음을 견디며 자낙스건 인데놀이건 데파스건 처넣고 본다. 일단 착석해 데파스 3부터 입에 넣고 보는 사람도 만만치 않게 미쳐있다.
나는 내 언어들을 되돌려받으러 왔다.
바깥에는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다. 소방? 경찰? 응급? 아니면 시국에 따른 소리인지 알 수 없다. 이 특수한 시위는 내 특수한 상황과 함께 들어맞아 내게 죄책감을 안기고 있다. 과거 박근혜 탄핵 시위 때에 나는 그 시위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다. 허리디스크 파열로 인한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는 수개월 지속되었으며, 그동안 통증으로 인해서만 응급실에 수차례 방문했다. 야간이라 더해진 비용들. 그 의료비를 어떻게 충당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늘 침상에 누워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데에도 수 분이 걸렸다. 사람들은 열심히 집회와 시위에 참여해 추위를 무릅쓰고 앉아 있었으며,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나는 열심히 모르핀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고통에 붙들려 대신 누워있었다. 물 하나 떠먹는 데에도 땅늘보처럼 기어갔다. 세상 돌아가는 판국을 알 리 없었다.
그 해엔 혈액투석을 요하는 리튬 과용으로 자살하고자 했고, 혼수에서 깨서는 담배부터 찾았다. 보호자가 비어 있는 동안, 잠깐의 탈출 가능성이 있는 시점이 있었다. 병원 지리를 매우 잘 알았기에,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았다. 그러나 그 선택을 내리지 않았다. 막바지에 포기하고 돌아왔다. 왜 도망치지 않았나? 자살을 택한 시점에 이미 빤한 도망 서사가 된 것 아닌가?
고통에 대해서는 언제나 싸울 맘을 잃는다. 질 게 뻔함. 당연한 것 아님? 내 고통엔 다중의 레이어가 겹쳐있다. 종종 디스크가 다시 터져 병원에 내원해 진통제를 받는데, 언제나 트러블들이 생긴다. 나는 오피오이드. 마약성 진통제를 원하고 의사는 약물 중독자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유구하게 트라마돌 함유량이 지극히 적은 아세트아미노펜을 손에 들 때면 나는 살의가 치솟는다.
“저는 이 약 안 들어요.”
그러나 의사들은 다리도 들어보고 구부려보고 하면서, 이 몸에는 더 높은 진통제가 불필요하다고 단정한다. 그 쓸데없이 단정적인 태도에서, ‘그 약은 중독성이 심해.’ 아니 누가 모른답니까? 차라리 ‘이보다 강한 약은 우리 병원에 없습니다.’라고 솔직히 말해. 언제나 고통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인 나는, 실은 이 의사와 이 무리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면 정신과 의사도, 심지어 정신과 의사처럼 길들인 챗GPT도 내게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벌어지는 부수적인 일들(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 자살에 대한 욕망 증가, 허무감, 충동성, 반사회적 충동 경향, 삽화 발생 가능성이 높아짐)에 대해 경고하고, 그것을 주의하길 권하기 때문이다.
올해, 마찬가지로 허리에 이상이 있었을 때 대여섯 군데의 병원에 들렀고 3차는 가지 못했지만 2차에서 떨어진 나는(마치 면접에서 떨어지듯) 울트라셋이알서방정 같은 것을 들고 패배자의 기분이 되어 돌아왔다. 정말, 미안한데 정말로 그 약은 듣지 않습니다. 실상 거의 모든 약이 내게 듣지 않는다. 비단 정신질환과 관련한 약물만이 아닌 이부프로펜이나 아세트아미노펜 같은 진통제 계열도 MAX를 찍었다. 나는 고도로 약물 내성을 지니고 있다. 나의 귀엽고 작은 약물세트의 약의 개수는 21개이며, 그것들의 용량은 높습니다. 나는 그들과 공생하고 있습니다. 나는 약물과 공생의 장면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모종의 가치를 환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과거의 탄핵 시위로 돌아가자. 박근혜 탄핵 시위에 나가보지 않은 나는, 솔직히 다만세 노래도, 가사도 다 외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 게으름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동시에 위축된 모습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연신 모였고, 그것이 어떤 의의와 앞날로 이어졌는지 나는 동시성을 가지고 구성하지 못했다. 새로운 흐름에서 도태되었던 나, 정권이 어떤 식으로 싸워 바뀌었는지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일단 당시 나는 서울을 떠났다. 어느 시점인지는 모른다. 시간은 고통의 심각 전후로 구분되었고, 미지근한 치료 전후로 재생성 되었다. 그러니 그때가 9월이었는지 12월이었는지의 구분은 내게 존재할 수 없다.
리튬 중독 수치는 2.5 mEq/L~3.5mEq/L만 도달해도 고도 중독으로 경련 및 핍뇨, 신부전, 사망에 이를 수 있다. 급성 중독의 경우 3.5mEq/L부터 혈액투석을 고려하는데 나는 4.2mEq/L가 나와 당연히 의료진들은 투석을 권고했다. 그러나 나의 보호자는 ‘혈액투석’을 영구적 ‘신장 투석’으로 오해했고, 전원을 원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들이 내리고 요구한 ‘의료적 판단과 요구’는 정말로 엉망이었기 때문에…사실 지금처럼 기능이 회복된 것은 거의 드문 케이스이다. 가족이 적극 고장으로 전원시키길 원했다. 나는 사설 응급차를 탔고, 운전사는 매우 위중한 사람을 태운 것처럼(?) 일부러 앞차에 경적을 울리고 사이렌 소리도 바꿔가며 운행했다. 어릴 적 잘 살던 애들이 타던 10개 정도 불이 다르게 들어오고 사이렌 소리가 제각각 다르던 그런 자전거를 탄 느낌이었다. 즉, 승차감 최악.
도착해서도 노골적인 냉대를 받으며 쫓겨날 뻔했다. 자살을 금기시하는 분위기의 고장의 병원에서는 나를 불길하게 여겼다. 사설 구급차를 몰았던 아저씨는 빨리 돈을 달라고 했다. 가족들은(리튬중독이지만 멀쩡한) 나를 집에 보내달라고 한다. 나는 여기서 나 혼자 미친 건가? 생각했다.
폐쇄병동에 가는 대신 치매 병동에서 머문 내게 주어진 티브이 프로그램은 <연합 뉴스>가 아니라 <6시 내 고향>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것이었다. 치료에 있어 마찰이 있었다. 가족은 혈액투석에 반대했고, 서울 TOP 6 병원인 곳도 리튬 수치 검사에 이틀이 걸렸는데, 이곳의 의료원에 그러한 걸 기대할 수 없었다. 그저 생리식염수를 걸어서 신장으로 걸러내는 짓만 한 달을 한 것이다.
병실은 사람의 죽어가는 소리로 가득했다. 정확히는 사람의 인지 능력과 뇌가 노쇠하는 공기로 가득했다. 어제까지 멀끔하던 사람은 다음날부터 정신을 놓았고, 그를 돕는 간호조무사들은 묶어둔 채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나는 같은 병실의, 같은 사람들과 세상과 동떨어진 채 살았다. 한 달은 그렇게 보냈고, 다음 달은 만화를 그리면서 보냈다. 나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며, 언제든 싸울 태세에 저주를 퍼부을 기세로 후자의 한 달을 보냈다. 가장 한심한 것은 원가족이 치료를 중단하고 늘 속히 퇴원시켜달라고 거듭 청했을 때였다. 그들 눈에는 매번 수액만 놓는 치료가 그다지 효과가 없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치료가유효했는지모르겠다) 마치 전근대 사회에서 ‘집’에 돌아와 ‘집밥’을 먹고 ‘운동’을 하면 병이 낫는다는 안아키스트들과 다름없었던 그들은 대사회적으로 일말의 기대도 할 수 없게 했다.
이후로 나는 디스크에 대한 온갖 참견, 그것의 관리에 대한 운동 충고, 관리 개선 등등 각종 다양한 말을 들었다. 그것은 고통을 인지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서 주도적으로 해야 하는 환자에 대한…복합적으로 모멸적인 발언이다. 실은 내 병증 전체를 두고도 해당하는 말이다. 이 시기를 지나며 나는 건강에 대해 의식적인 등한시와 더불어 정치에 대해서도 말수가 줄었다.
그러나 이를 ‘반박’ 당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자신은 이러저러한 부분에서 곤란을 겪고 있기 때문에 너보다 상황이 나쁘다느니 하는 말로 말이다. 파열된 디스크는 후유증이 남았고, 반복적인 파열을 경험한다. 이전에 문제가 있었던 척추 45번에서 지금은 더 아래쪽에서 관련 현상이 나타난다. 신기능의 회복이 얼마나 이뤄졌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떠밀리듯 가족에게 돌아갔다.
젠장. 내가 다시 상경해 정세를 파악하고, 시민이라는 구성원의 의무를 다하기 전에 대통령이 먼저 바뀌었다.
병원 밥을 먹고 있을 때? 퇴원을 했을 때? 하나도 모른다! 그동안 유수의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꿨다! 나는 나 하나 건사하지 못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8년이 지났고, 나는 더욱 정신병이 심해졌다. 한국 사회에서 시민됨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선택이 이런 탄핵 집회처럼 거대 규모의 시위에 참여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 자리에 없었고, 훗날, 이 감정을 죄의식, 자책감, 그리고 무력감이나 씁쓸함…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아직도 가장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2008년 전후, 나는 거의 모든 시위 현장에 있었다. 광화문에 매일같이 있었고, 언제나 전경과 대치했다. 사람들이 얻어맞으면 빼내고 도망쳤고, 수세에 몰리면 관광객 틈으로 사라졌다. 종종 깃발도 만들곤 했다. ‘깃대는 낚싯대면 충분해.’ 지금은 아메리카로 이민 간, 당시엔 빨갱이 선배가 말했다. 지방 소도시 출신의 내가 서울 지리를 빠르게 외게 된 건 다 집회 덕분이다. 명박산성이 쌓이는 걸 보았고, 새벽까지 사람들이 그걸 넘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자리에도 있었다.
처음 퍼포먼스도 그 무렵의 일이다. 나는 분필을 들고 갔고, 행진과 사람들로 막힌 곳에서 흰 백묵으로 그림을 그렸고 사진도 몇 번 찍혔다. 용산참사가 있을 땐 맞은편 건물에 있었다. 다음날 그 건물에 갔다. 이마트. 재능교육. KTX 승무원. 콜텍 기타, 학내 청소 미화 노동자. 당시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서울 지도는 ‘어디’에 ‘어느 단체’가 시위를 ‘얼마나’ ‘왜’ 하는지 지도가 각이 잡혀 있었다. 한진중공업 때에는 친구와 희망버스를 탔다. 그 녀석은 카투사 출신이어서, 미군 복장을 빌렸고, 그 친구는 국군 옷을 입었다. 그때는 캡사이신을 맞았고 노숙을 했다. 경향신문 사옥을 경찰이 진입하려던 2013년 그날은 12월임에도 비가 왔고, 그럼에도 물대포를 쏘았다. 쫄딱 젖은 나는 삼삼오오 도착했던 친구들을 만났고, 개중에 한 명과 사옥의 옥상에 갔다. 중간중간 사람들이 삐라를 뿌렸다. 그것은 공중에 흩뿌려지는 대신 비에 젖어 추락해 밟혔다.
아마 그것이 마지막 시위였을 것이다. 15년 여름에 완성된 원고에서 나는 ‘허리가 아프다’고 후기를 남겼으니까. 허리가 아파 시국에 섞여 들지 못하다니 이는 우습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아, 마지막이 이것이 아니다. 마지막은…아마 어떤 페미니즘적인 시위였던 것 같았다. 나는 지팡이를 짚었고, 대학 때의 은사님과 만났다. 이후 그분과의 관계는 다시 이어지지만, 그 사이엔 많은 일이 있었고, 그건 많은 개인적인 일들이었다.
내가 겪었던 집회, 시위, 행진, 그 외의 운동과 그것의 몰락. 그러나 다시 재개, 변화 등은 사실 당연한 수순이다. 사회는 역동하기 때문에. 나는 대학가의 운동이 저물어가기 직전에 학교에서 탈출했기 때문에 더 많이 기억할 수 있었다. 그 기억들은 다소 미화되어, 분명 그 정치적 역학 아래에서 나는 숨통 틀 새 없이, 무지한 것이 많고, 알려주는 이들도 없어 혼란을 겪었지만, 기억 속에서는 공간과 시간과 인간들로 겹쳐져, 제법 그럴싸한 유화처럼 남았기 때문이다.
언젠간 이에 대해 글을 쓸 수는 있겠지만, 내가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은 바깥세상의 변화를 알 힘 하나 없이 죽어가던 나에 대한 번민이다.
내가 자책하는가? 죄의식을 느끼는가? 빚을 느끼는가? 모두 예스이다. 심지어 나는 그때 투표도 안 했는지, 못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공정하게 내게도 불의를 느낀다. 내게 수천 개의 이유가 있더라도, 내가 마땅한 책무를 이행하지 않은 데에 대한 감상은 오래 남을 것이다. 다시금, 이토록 수상해진 시국에서, 나는 이번엔 더 넓어진 의무를 택할 여유도, 대가를 치를 여력도 있다. 그러나 내 의욕만 앞선다고, 섞여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국민의 이미지가 있고, 우리는 그것에 속하거나 그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너는 뭐냐? 라는 눈빛들이 생각난다. 나는, 나는 그래 ‘정신병자다!’. 그러한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오갔다. 사회적 바닥에 있는 약자들이, 의욕만 앞선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세상은 그들에게 땅뙈기 하나 내어주지 않는데. 거대한 적은 우리를 우리처럼 만들지만 끝에 가면 ‘난 사실 네가 싫었고, 같이 있는 건 더더욱 싫었어.’ 하고 가버릴 것들이 벌써 눈에 선하다. 국민주의의 유령이 여즉 떠돌고 있음에…. 나는 계속하여 그 삶을 버리고 부인하고 거부하고 떠나왔지. 사람들이 갖는 공통의 관념과 기억에서도 멀어지면 안 돼. 내가 더 멀어지면, 나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이에게 구명줄 던져주는 매듭법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게 된다고.
그래서 써 보았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피해야 하는 일은 이런 결과를 낳기 때문이에요. 너는 우주를 유영하는 스페이스맨처럼 보이는, 속에는 산소가 닳고 호흡이 멈춘 진 오래, 바이저가 어둡기에 그저 춤추는 것처럼 보이는 멋진 우주인처럼 보일 뿐. 거닐었던 세상은 다 지나갔고, 자라온 세월은 거죽을 녹이고 뼈를 부순 지 오래. 조금만 조금씩만 움직였어야 했다고 후회하면 늦다. 부푼 키다리 풍선들이 하염없이 흩날리듯 오늘은 오른쪽, 내일은 왼쪽으로 구부러져야 한다. 큰 바람은 집과 차를 부수지만, 작고 흰 비닐봉투는 태풍 하나도 찢지도 못하니까.
윤석열에게. 하나는 저러한 권력과 지위에 오르는 사람이 미칠 수 있는가? (YES) 둘째는 권력도 지위도 없고 생활고와 빈곤에 시달리는 정신병자의 미침과 그것은 다른가? (NO) 다르다면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우리는 거리낌 없이 윤석열을 일컬어 미쳤다고, 정신 나갔다고, 정신이 넹글 돌아버렸다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알코올 중독자로 정평이 나 있으며, 인지 능력 저하를 비롯 판단력을 의심하는 각종 임상의학 진단 및 음모론(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윤석열의 기괴한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 사실이라 여긴다)까지 그를 이상하다 말한다.
그러나 윤석열의 광기는 평범하다. 세계 굴지의 백인 남자 싸이코패스 기업가들이 구는 이상 행동을 볼 때와 비슷하다.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블랙 기업의 사장 정도에서만도 목격할 수 있는 권위와 권력에 도취된 자의 언행들에 대해, 미쳤다는 것, (심한 욕)같이 군다는 건 유머이고 기행에 불과했고, 윤석열이 천 모 씨의 받아쓰기 종이가 되었을 때, 김건희의 가방은 누구의 옷장에 있을까? 같은 동화 제목 같은 일이 벌어졌어도 사람들은 비웃었다.
비웃음이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정신병자인 나도 지극히 마이 오운 프라이빗한 시국선언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이 2025년의 주간리단의 시작이다.
나는 미담도 아니요, 상식도 아니다.
단지 내가 진 빚을 되갚으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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