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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너울 Mar 30. 2022

5. 음악에 잠겨 죽는 오필리아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사운드트랙

 Vessel의 <Red Sex>를 주구장창 듣고, 가장 사랑하던 노래 Kimbra의 <Cameo Lover>에마저 무감각해진 것을 지나, 상담실에서의 대화를 통해 마음을 기워 붙이기 시작할 때까지의 시간 그 어드매에서 나는 한동안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시간이 꽤 길었다. 오늘은 그걸 통렬하게 깨닫게 해 준 곡 하나에 얽힌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그 일이 있던 당시 내가 살던 곳을 편의상 K시라고 하자. K시에 사는 동안 내게는 마음의 도피처 같은 단골 카페가 하나 있었다. 테이블 네 개가 들어갈 정도로 자그마하고 조명 빛이 아늑했던 그곳은 골목길 안쪽에 숨은 듯이 있는 개인 카페였다. 


 무언가를 읽거나 쓰고 싶은데 집에서는 마음이 불안해 집중할 수가 없을 때 나는 숨통을 트기 위해 주로 카페에 갔다. 집에 다른 가족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혼자 있을 때도 왠지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려고 하면 심장이 퉁게퉁게 뛰어서 제대로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때 한창 상담을 시작했던 차라 가족에 대한 분노가 마구 표출되었고 가족들은 그런 나를 대하기 매우 곤혹스러워했기 때문에 싸움도 눈물도 잦아서 집 자체가 그리 마음 편안한 곳이 아니었던 것 같다. 장소를 옮기면 다만 몇 장이라도 책을 읽을 수 있었고 한 장이라도 일기를 쓸 수 있었다.


 그때 가장 많이 갔던 곳이 그 조그마한 단골 카페 R이었다. 카페 특유의 이완된 분위기가 내 마음을 많이 안정시켜주었다. 카페 음악은 다른 손님들이 내는 소음과 섞여 일종의 백색소음이 되기도 해서 집에서 혼자 듣는 음악에 비해 ‘안전’했다. 특히나 카페 R은 인기 차트 탑 100을 트는 카페처럼 음악이 변화무쌍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곳 매장 분위기와 잘 녹아드는 앨범을 한 장 골라 쭉 틀었으므로 매장 내에 흐르는 음악에 통일성이 있었다. 그래서 좀 더 안전했다.    


 나의 첫 브런치 매거진인 <우울증과 음악 오딧세이>에서 이 카페 R은 매우 중요한 장소다. 내가 오늘 말할 ‘음악을 못 듣게 된 나’를 깨닫게 된 곳이면서 다시 음악을 듣게끔 도와준 곳이기 때문이다. 


 밝은 감정에 점점 소외감을 느껴 감각적이지만 음울한 곡인 <Red Sex>를 즐겨 듣던 나는 ‘노래 자체’를 점점 듣기 힘들어했다. 노래의 어느 부분이 트리거가 되어 나의 우울을 퍽 터트려버릴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노래를 ‘함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이런 증상은 나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우울증을 겪은 나의 친구 두 명도 비슷한 말을 했다. 요새 음악을 안 듣는다고. 잘못 들으면 우울해지고 심할 때는 죽고 싶다고 했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차라리 내 우울과 불안의 트리거를 당기는 노래나 음악 장르가 딱 정해져 있다면 피할 수나 있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날 다른 데서 들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곡에 짓눌린 적도 있었다. 내가 안전하다고 믿은 카페 R에서 들은 음악 한 곡이 그랬다. 그 곡을 듣는 순간 불안이 찰랑찰랑 차오르더니 어느새 내 머리 위를 넘어서 전신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엄청난 수압에 짓눌린 사람처럼 숨도 쉴 수 없었고 허리를 펼 수도 없었다. 차라리 아예 테이블에 엎드리고 싶었는데 엉거주춤하게 숙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곡이 끝날 때까지 나는 극한의 공포에 질린 채 제대로 떨지도 못하고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곡이 다 끝나고 나서야 나는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글로 옮기며 곱씹어보니 일종의 공황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그전까지 음악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거나 죽고 싶은 마음이 건드려져 무기력해진 적은 있어도, 이렇게까지 격한 신체적 반응이 온 건 처음이라 그 상태가 지나가고도 너무 무서웠다. 문제의 곡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The Shape of Water>의 사운드트랙 중 하나였고, 나는 그 영화를 극장에서 봤었다. 우울하거나 불안한 상황, 혹은 폭력적인 상황에 나오는 곡도 아니었고 영화의 몽환적인 오프닝에 쓰였던 곡이었다. 극장에서 이보다 더 큰 스피커로 들었을 때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처음 듣는 곡도 아니고 전에 들었던 적이 있는 곡, 심지어 전에 들었을 때는 멀쩡했던 곡이어서 나는 갑작스레 촉발된 이상 반응에 낭패감마저 들었다.


 글을 쓰며 <The Shape of Water>의 사운드트랙들을 다시 들어보았다. 지금의 나는 그때에 비해 우울과 불안이 훨씬 줄어든 상태기에 그전과 같은 심리상태를 ‘고증’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객관적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말인즉슨, 무엇이 트리거가 되었을지 짐작이라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The Shape of Water>의 사운드트랙들에는 전반적으로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돈다. 오프닝으로 쓰인 주제곡은 특히 더 그랬다. 그런데 사실 몽환적인 분위기 안에는 어느 정도의 멜랑콜리함이 숨어 있고 신비로움 안에는 미지의 상황에 대한 불안도 내포되어 있다. 듣는 사람이 건강할 때 이런 신비로움은 적당한 호기심을 유발하겠지만, 당시 내 마음속 물잔에는 이미 일상에서부터 불안과 우울과 슬픔이 찰랑찰랑 차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 주제곡에 담긴 멜랑콜리함 혹은 미지에 대한 불안감이 한 방울이 더해지며 한계점을 넘어버렸다. 나는 외부에서 단 한 방울의 부정적인 자극만 더해져도 내 내면의 불안이라는 물에 잠겨버릴 준비가 되어 있던 것이다. 게다가 해당 주제곡은 물이 차오르는 장면에 쓰였던 것으로, 청각적으로도 뭔가 차오르는 심상을 전해줬을 수 있겠다.  


 이제 그 당시의 내 심리상태를 더 잘 묘사할 수 있다. 내 마음속에 있던 불안의 잔은 어느새 내 머리 위로 올라가 물을 부었다. 그런데 그 유리잔은 내 마음과 연결된 것이라 불안과 공포라는 물이 끝도 없이 나왔다. 나는 내 마음이 보낸 검은 파도 아래 잠겼다. 그 안에서 나는 숨 쉬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사운드트랙이 다 끝나고 나서야 눈물이 차올랐었다. 참 불공평하다. 어차피 이럴 거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눈물로 나오지 왜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검은 물폭탄이 된단 말인가. 누구 탓인지 방향을 찾을 수도 없으나 무언가 억울했다.


 나에게만 보이고 나에게만 느껴졌던 이 ‘사건’이 있고 얼마 안 있어 카페에서 나왔다. 기운이 다 빠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서 짐을 챙겨 걸었다. 


 그날 나는 음악에 잠겨 죽는 경험을 했다. 음악이 건드린 나의 불안에 잠겨 죽는 경험을 했다. 우울증에 빠지기 전에 내가 자주 듣던 음악은 주로 드라마틱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내가 원하는 감정의 도입부거나 증폭기였다. 나는 직접 재생 버튼을 누른 음악에 압도당하기를 즐겼고, 한번 그 음악에 빠지면 나는 그 안에서 그 곡의 정서에 겨워 헤엄을 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날 이후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내가 원하는 노래에 빠져 헤엄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세이렌의 노래에 정신없이 빠져들다 여운을 갖고 무탈하게 빠져나오는 운 좋은 오디세우스였다가 물에 젖은 옷감의 무게에 익사하는 오필리아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한동안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다시 ‘안전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나게 될 때까지…….     


이미지 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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