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나의 첫사랑은 여섯살 때 TV에 나왔던 차인표 아저씨였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저 쬐끔한 게 뭘 안다고 컴컴한 새벽까지 TV앞에 붙어있는 것인지 신기하다고 했다. 그 뒤로도 나는 TV 안과 밖의 참 많은 남자들을 사랑했다.
스무살 때 처음 시작한 연애 때부터 나는 꽤 자주 '금사빠'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별거 아닌 순간으로 사랑에 빠지고 별거 아닌 순간으로 정이 떨어졌다.
나의 연애라고 해봤자 손가락 안에 다 꼽을 정도이지만 십 년 넘게 누군가와 만나고 또 헤어지면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그 놈이 그 놈이고 나는 누군가를 만나기에는 참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
소위 말해 '나쁜 남자'에게 끌렸고 만나는 내내 속앓이를 하면서 된통 고생을 하다가 '착한 남자'를 만나면 금방 시시해져서 뻥 차버리고 또 외로워하는 것이 나의 이십대였다.
그냥 나같은 사람은 아빠 말대로 평생 고양이나 키우면서 늙어가야 하는 것인가. 처음에는 그게 너무 무섭고 괴로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미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짧은 연애를 허무하게 마치고 난 뒤 나의 마음은 더욱 굳게 닫혔다. 고양이들은 왜 인간보다 수명이 짧아서 나를 고독하게 하는 것일까. 고양이도 거북이처럼 오래 살았다면 평생 고양이와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철학관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한창 연애운, 결혼운에 관심이 많던 친구를 따라 갔는데 그 때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일과 가족이었다.
간판도 없이 오직 입소문으로만 꽉꽉 예약이 들어찬다는 그곳의 파파 할아버지는 아주 친근하고 다정하게 친구에게 연애와 결혼에 대한 행복한 미래를 점지해주었다.
다음으로 내 차례가 되었는데 내 질문을 듣기도 전에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네, 결혼할 생각은 있는가?"
제가 궁금한 점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저와 맞는 것인지, 저는 언제쯤이면 아빠와 그만 싸우게 되는지(당시에는 정말 눈을 뜨기 괴로울 정도로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것들인데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앞서 상담한 내 친구에게 소위 '짝'이 찾아오는 시기는 앞으로 4년이나 열려있는데, 나는 이미 그 시기를 스물다섯살에 지났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1년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2022년의 정월대보름. 그 할아버지가 내게 점지해준 카운트다운의 종말일이 정해졌다. 무척 황당해서 철학관을 다녀온 후로 주변 지인들에게 정월대보름과 그루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고 다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흔한 가사의 표현처럼 시간이 화살을 타고 날아갔다. 파파 할아버지와 카운트다운을 까맣게 잊고 있을 때 쯤, 진도에 사는 농부 동생이 뜬금없이 전화를 했다.
언니, 소개 한 번 받아볼래요?
내가 지극히 '자만추'단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아는 동생이기에 의아했는데 또 말을 잇는다. 언니, 내일이 정월대보름이잖아요.
당시 나는 꽤 많은 주선이 들어왔는데 대부분 거절을 하거나 어쩔 수 없이 연락을 시작해도 조용히 잠수를 타고는 했다. 정말 고양이만 키우면서 살아도 되겠다는 상상이 점점 구체적인 목표가 되었던 것 같다. 정말 나쁘지 않은데?
그런 나를 보며 우리 부모님은 각자의 이유로 초조했던 것 같다. 아빠는 내 딸래미가 정말 장례를 치뤄줄 자식도 없이 혼자 죽을까봐(고양이들이 니 장례 치뤄줄 것 같냐!라고 하셨음), 오히려 내게 비혼을 추천했던 엄마조차 내가 '연애고자'가 되어 인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한 부분을 아예 포기하고 살까봐.
그래도 한 번이라도 직접 만나보는 건 어때, 라고 엄마가 툭툭 던지던 시기였는데 마침 농부 동생이 설명하는 남자의 조건이 왠지 나랑 이어지지 않을 사람일 것 같아서 흔쾌히 허락했다. 그래, 가벼운 마음으로 바람이라도 쐬고 오지 뭐!
사실 몇 달 동안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파파할아버지의 카운트다운이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내게 경고했다. 자네 사주에는 남자보는 눈이 없어.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하는데 자네는 겉만 번지르르한 남자를 만나려고 해. 얼굴이 조금 못나고 재산이 많지 않아도 진정으로 자네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야 해.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하는 할아버지에게 되려 툴툴댔다. 마음의 눈으로 어떻게 보는데요?
그건 아주 쉽다네. 자네의 짝을 만나면 알게 될 것이네. 얼굴은 조금 못났어도 누구보다 자네를 사랑해 줄거라네.
남자들은 원래 사귄 지 얼마 안 되면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잖아요.
그런 것이랑 다르다네. 확연히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자네를 좋아해줄 남자를 만날 거라네. 다만 자네가 마음의 눈으로 알아보고 놓치면 안 된다네.
그렇게 파파할아버지와의 지난 대화를 회상하면서, 은근한 기대를 하면서,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2년 하고도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우리는 결혼식장 예약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