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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Nov 08. 2022

부부의 작은 집

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39


부부의 작은 집

Cromwell, Central Otago

New Zealand



“적어도 체리는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까!”

그게 우리의 머리를 점령한 단 하나의 생각이었어. 아주 오래오래 계속됐으면 바랐던 여행이 또 돈이라는 녀석 때문에 강제로 종료되고 말았지. 그렇게 우리는 다시 징글징글한 돈을 벌러 어딘가로 흘러가야만 했거든. 가족끼리 운영하는 작은 체리농장에서 오라고 하기에 냉큼 간다고 하긴 했는데, 하루에 일은 몇 시간이나 할 수 있을지 돈은 얼마나 벌 수 있을지 전혀 모르겠더라고. 작황이 안 좋다는 둥 소문은 흉흉하고 그나마 불러주는 데가 거기뿐이라 일단 가기로 했지. 적어도 체리는 마음껏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거기서 어떤 슈퍼바이저 아줌마를 만났는데 — 아, 아줌마라기보다는 할머니가 맞을 것 같아. 우리는 그날그날 체리 밭에서 수확한 체리를 고르는 일을 맡았고, 우리가 확인한 걸 한 번 더 확인하는 게 그 할머니 슈퍼바이저의 일이었어. 네모난 노란 양동이 가득 담긴 체리를 테이블에 쏟아놓고 상하거나 상처 나서 상품가치가 없는 걸 골라내고, 다시 양동이 가득 담긴 체리를 쏟아놓고. 그렇게 무한 반복이었어. 양동이 하나에 얼마씩 쳐주는 일이라, 스피드가 생명인 일이었지. 그래서 할머니 슈퍼바이저와는 이야기할 시간이 별로 없었어. 눈에 불을 켜고 계속 양동이를 비워야 했으니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야. 중요한 건 그 할머니 슈퍼바이저와 남편 분의 집이었어. 집이 정말 엄청났거든. 태어나서 그렇게 아름다운 집은 처음 봤어. 늘 보면서 가슴만 두근대느라 사진 한 장도 남기질 못했어. 바보 같지? 나도 언젠가 저런 집을 가져야지 생각했는데.  더 웃긴 건, 단 한 번도 그 집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는 거야. 언젠가 다른 슈퍼바이저가 그 할머니 슈퍼바이저의 집에 초대를 받았었다고 하면서 집안이 어땠는지 얘기를 해줬어. 들으면 들을수록 더 굉장하다고 생각했어.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더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되더라고.


할머니의 남편 분이 퇴직을 하고 나서, 두 분은 남은 여생을 여기저기 여행을 하면서 지내기로 마음먹었대. 보통 한국에서는 은퇴를 하면 집을 사든지 짓든지 하는데, 이분들은 거꾸로 살던 집을 팔아서 아주 커다란 버스를 샀대. 남편이 버스를 개조해서 가장 안쪽에 킹사이즈 침대를 놓고 부엌과 화장실과 샤워실을 설치했대. 어쩌면 내가 엄청나다고 생각했던 건, 부부의 작은 집이 아니라 그 집을 선택한 부부의 삶의 방식이었을지도 몰라. 한 곳에 머무르며 평생을 살았으니, 일도 없고 자식도 없는 지금이야말로 떠돌이 생활을 시작할 때라고 결심하는 게, 말이 쉽지. 안 그래?


다들 머릿속으로 한 번쯤 나이가 아주 많이 들면 무얼 할까 생각해보곤 하잖아.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기엔 너무 먼 미래니까 그냥 대충 이렇게 살면 좋겠다, 하고 그려보는 거지. 그 부부의 집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그림이, 그런 미래가 있을 수 있다고 상상도 하지 못했어. 주변에 이렇게 사는 사람도 없었고, 은퇴 후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말도 들을 길이 없었지. 이런 삶의 방식 자체에 대한 어떤 인지조차 없었어. 그런데 막상 이렇게 눈앞에 펼쳐지니까, 단번에 이 그림이 머릿속에 박혀버렸어.


아, 나도 나이 들면 이렇게 살아야지.

큰 버스에 모든 세간살이를 싣고, 하루는 부엉이 우는 산 아래에서 자고 또 하루는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다 옆에서 자고. 일어나서 내키면 거기 더 있고,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보고. 날씨가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듣고 눈이 오면 눈밭을 신나게 굴러보는 거야.


언제쯤 그 부부의 집 같은 작은 집을 가질 수 있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하지만 언젠가 그런 작은 집을 갖게 된다면, 부부의 작은 집처럼 창가에 색색의 꽃화분을 쭉 걸어 놓고 자전거도 두 대 매달아 놓을 거야. 큰 창에는 레이스 커튼을 달아놓고 창문을 열어서 바람에 하얀 커튼이 흩날리게 할래.


탱글탱글한 체리나 왕창 먹을 수 있을 줄 알았지, 먼 미래에 갖게 될 집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될 줄은 몰랐어. 여행을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그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이 내 삶까지 풍부하게 해주는 것 같아. 나는 상상도 못 한 삶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걸 보면 그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거든. 그렇게 조금씩 시야가 넓어지는 건가 봐. 모두가 다 똑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경주마로 살아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깨닫게 해.


그냥 체리나 와그작 먹고 꽃냄새 맡는 조랑말의 삶도 그리 나쁘진 않다고. 아니, 사실 꽤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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