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를 좋아한다. 직접 쬐는 건 싫지만 소파에 앉아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보고 있노라면 행복하다. 거기에 좋아하는 작가의 책까지 읽고 있을 때면 그게 어디든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인가' 싶다. 예전부터 있었던 것 같고, 언제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어릴 때는 책 읽기가 싫었다. 숙제처럼 나오는 독서감상문을 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장 짧고 글이 적어 보이는 책을 꾸역꾸역 읽었다. 꼭 추천 문학에서 읽어야 할 때에는 또 어쩔 수 없이 그중에 얇은 책을 골라 읽었다. 책을 펴면 잠이 왔고, 책 하나를 다 읽기가 어려워 목차와 처음 끝만 읽고 감상문을 쓸 때도 있었다.
처음 제대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마침 짝꿍이 된 아이가 하필 전교 1등이었고, 독서든 서예든 음악이든 뭐든 다 잘해야 하는 친구였던 탓에, 쉬는 시간에도 늘 뭔가를 하고 있었다. 학기 초에 달리 친구가 없던 나는 끈질기게 그 아이를 귀찮게 했는데, 내가 하도 귀찮게 하자 '너도 공부해'라며 공부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 친구가 읽고 있던 책이 (지금 내가 무척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미하엘 엔데의 '모모'였다. 지금 생각해도 초등학생이 읽기에 그리 적합한 책인지 모르겠지만, 그 아이는 그때 그런 어린이와 어른이 둘 다 읽을 수 있을 법한 동화들을 읽고 있었다.
그냥 '모모'라는 이름이 예쁘고 노란 곳에 콜로세움 같은 그림이 어렴풋하게 그려져 있는 (당시에 콜로세움이 뭔지도 몰랐겠지만) 표지가 예뻐서 그냥 빌려 읽었다. 당시에 나는 그 이야기를 반쯤 이해했던 것 같다. 정말 회색 신사는 나쁘고 모모는 착하고 미장이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고, 그림 뒤에 돈을 숨겨두고 까먹은 아저씨는 멍청하고.. 그런 정도의 이해였던 듯하다. 그러면서도 만담꾼이 시간에 쫓겨 더 이상 이야기를 즐겁게 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하나 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당시에 내가 좋아하는 책은 '동화'였다. 마시멜로우 이야기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같은 인생에 도움이 될 법한 이야기도 좋아했지만, 어디까지나 동화식 서술이 재밌었던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쥐들이 치즈를 옮기는 이야기나, 아이들이 마시멜로우를 먹지 않고 참는지 실험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장님이나, 그 이야기를 듣고 변해가는 운전수의 이야기가, 당시에 내게는 나를 성장하게 하는 무언가라기보다 잘 짜인, 그저 재미있는 하나의 이야기였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어 나는 다시 책을 멀리 했다. 한참 공부와 게임에 빠져 아침 일곱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공부하고 남는 시간에는 게임을 했다. 책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던 시기 었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어 수능을 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동화를 좋아했던 나는 너무 염세적인 청소년으로 성장한 탓에 비문학만 골라 읽었다. 뭔가 성공을 도와줄 것 같은 책들, 지식을 늘려줄 것 같은 책들만 골라 하루에 한 권씩 읽었다. 크게 빠지거나 재미를 느끼지는 않았다. 하루에 한 권을 읽는다는 목표를 채우기 위해 아무렇게나 고른 책들이었다. 덕분에 글을 읽는 속도가 빨라졌고, 언어 영역을 다 풀 수 있을 만큼 늘었다. 다만 지겹게 읽은 탓인지 수능이 끝난 후부터는 어떤 비문학을 봐도 다 봤던 이야기 같고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때쯤부터 소설을 읽었다.
영화도 평화롭고 무난한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소설도 일상을 다룬 이야기를 좋아했다. 판타지가 난무하거나, 살인과 불륜이 난무하고 막장 드라마가 이어지는 험난한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내 마음도 소란스러워지는 기분이 들어서다.
소소하지만 평화롭고 그 안에서 또 슬프고 기쁘고 행복한 이야기들을 읽고 있자면 그 잔잔한 기분에 나도 취해 함께 느긋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게 지금의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다.
모처럼 쉬는 날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니, 유리창 너머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지금 사는 집은 남향이라 아침에도 저녁에도 해가 든다. 나는 할 일이 몇 개 떠올랐지만 잠시 미뤄두고 소파로 가 책을 짚었다. 집을 나서기 전 한 권을 다 읽어, 다시 새로운 책을 골라야 했는데, 이번에는 빌린 책 중 가장 재밌을 것 같았던 '도토리 자매'를 골랐다. 가장 얇은 책이기도 했다. 그리고 해가 지는 동안 책을 읽었다. 200 페이지가 안 되는 그 책은 한 시간 반쯤 지나 나무 사이로 해가 가려질 때쯤, 이미 끝을 보였다. 앉은자리에서 한 권을 다 읽기는 참 오랜만이다. 이렇게 짧은 책을 읽는 것도 오랜만이고.
도토리 자매는 예감대로 재밌었다. 아마 내가 자매라 그런 것도 같다. 읽으면서 내내 언니 생각이 났다. 형제라는 게 참 신기하다. 어릴 때는 원수 같다가 어른이 되고 나면 떨어져 살면서 되려 우애가 생긴다. 없던 정이 생기는 건지 잠재적 친밀감을 깨닫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 미워 죽던 형제도 어른이 되고 나면 애틋해지는 그런 게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다 된 빨래를 널고 오늘까지 마감이었던 시스템을 확인하러 잠시 회사 서버에 접속했다. 업데이트가 없다. 우선 그냥 둬 봐야겠다. 시간을 보니 아홉 시다. 아마도 나는 한 시간 반 남짓 책을 읽었던 모양이다.
하지제였던 만큼 요즘 이곳은 해가 길어져 열한 시나 되어야 어둑해진다. 그 덕분에 좋아하는 해가 드는 걸 자주 볼 수 있어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행복한 기분이 된다. 안 좋은 점이라면 오전 다섯 시부터 해가 들어 잠에서 깨 버린다는 건데, 이 마저도 주말에는 꿀 같은 낮잠을 잘 수 있어 좋다.
더운 나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런 기분일까? 해를 좋아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해는 좋아도 더운 건 싫다. 밴쿠버는 언제나 해가 비칠 것 같은 인상인데. 어쩌면 다음 나라는 연중 날씨를 보고 고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