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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Jul 26. 2021

호주에 사는 외국인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직 유학생 신분으로 일하던 시절, 생활이 좀 나아지고 커피를 만드는 데에 질려갈 때쯤 유학원으로 이직했다. 그때만 해도 졸업을 일 년 정도 남겨뒀던 터라 어떻게든 졸업하기 전에 사무직으로 일해봐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유학원은 사무직을 경험하기 퍽 좋은 환경이었는데, 우선 유학원 직원들은 한국인이라 큰 부담이 없다는 것과, 학교와 정부는 호주 사람들이니만큼 업무는 모두 영어로 처리해야 한다는 점이 그랬다. 게다가 유학원 각종 셔류작업부터 비자신청까지 여러 가지 업무를 도맡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학교와 컨택하고, 이벤트를 기획하고, 유학원을 홍보하고, 인보이스를 발행하고, 커미션을 독촉하는 일까지 웬만한 사무 업무는 다 해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호주에 사는 외국인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국 유학원에서는 현지에 사는 한국인을 고용하는데, 이 말은 다른 사무직과 달리 호주 현지인과 경쟁이 붙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게다가 늘 수요가 있고, 비자만 안정적이라면 파트타임으로 근무가 가능했다. 대학 졸업 전에 사무직을 경험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있을까? 


하지만 내가 유학원에 근무하며 가장 큰 득을 본 사람은 아마 가족과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유학원에 근무할 무렵, 한국에 있던 언니와 친구들은 모두 졸업을 앞두고 한참 고민하고 있었다. 대부분 마지막 학기를 등록하기 전, 한 학기를 휴학하거나, 고시 공부에 도전하거나, 어학연수를 다녀오고는 했는데, 마침 내가 호주에 있다는 구실로 겸사겸사 호주로 여행을 온 친구들이 있었다. 흔히 유학원을 생각하면 학교와 연결해주는 곳이라 생각하지만, 관광여행, 숙소알선까지 현지에 놀러 온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거의 모든 것을 하는 곳이다. 덕분에 나는 친구들에게 선물로 관광여행 패키지를 보내주고, 기간이 넉넉할 때는 어학교 체험을 시켜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퍽 좋은 친구가 아닌가. 어디 나 같은 친구 없나. 


"지윤 씨 내일은 연차라고 했나?"


그리고 가끔, 친구가 놀러 오면 연차를 내고 다른 주로 함께 여행을 가기도 했다. 


"타즈메이니아 간다고 했지? 좋겠다. 나도 아직 안 가봤는데."

"올 때 선물 사 올게요."

"참, 회의 준비 다 했어?"

이것만 프린트하면 끝나요. 나는 안건과 보고서를 프린트하고 회의실로 향했다. 당시 일하던 유학원에는 중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한국인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덕분에 회의는 반은 한국어로, 반은 영어로 진행됐다. 


"그럼 기획은 이 정도로 하고, 이번 달 실적은 어떻게 되지?"


실적. 영업만큼 실적이 명확히 드러나는 직업도 없지 않을까 싶다. 영업이 적성인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매주, 매달, 실적을 보고할 때마다 평가받는 기분, 긴장감이 도는 회의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리셋되는 실적. 어쩔 수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비교되는 경쟁 사회. 모두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 매출을 올리던 카페 일과는 달리 일의 대부분이 개인의 실적으로 직결되는 영업은 사람을 피 말리는 재주가 있었다. 간절한 사람일수록 더욱더 쉽게 흔들렸다. 

생계를 위협받는 압박감. 이라고 해야 하나. 숫자 하나 실수하면 안 되는 회계사도 늘 긴장감 속에 살아가지만 이건 종류가 달랐다. 신중해야 하고 집중해야 하기에 스스로 유지하는 긴장감과 달리, 묘한 압박감속에 짓눌리는 듯한 공기가 흘렀다. 숨이 막혔다. 

여직원이 우는 일은 허다했고, 큰소리가 오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남자들은 내색을 안 하는 건지 어디서 혼자 몰래 우는 건지, 겉으로 보기에는 금방 털고 일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여직원들은 몇 달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일이 많았다. 근무하던 일 년 남짓의 짧은 기간, 대여섯의 직원이 스쳐 갔다. 


사무직이 처음이었기 때문일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정작 그 안에 있을 때는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직시하지 못했다. 일 년 정도 일하고 마지막 학기에 풀타임 인턴(full-time intern)을 시작하면서 유학원을 그만두고 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깨달았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불편한 직업. 나는 영업을 그렇게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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