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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Jul 20. 2021

원래 좋은 이별은 없다지만..


그를 알게 된 건 행운이었을까.


키다리 아저씨를 알게 되었을 무렵, 내게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좀처럼 낯을 가리지 않는 내가 그를 발견하고도 학기가 끝날 때까지 말 한번 붙이지 않았던 건 그런 이유였다. 관심이 가는 남자에게 말을 붙이는 건, 바람의 전조가 될 거라 생각했다. 안 그래도 한참 위태위태한 관계였기에, 나는 더욱 조심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머지않아 나는 그와 끝장을 보고 말았다. 처음에는 반짝반짝 빛나고 더없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던 관계가 다시 돌아보기도 싫을 만큼 망가질 수 있다는 건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다. 


한때 내 남자친구였던 그는 백 팔십 센티에 달하는 큰 키에, 곱상하고 하얀 얼굴을 가진 전형적인 미남이었다. 게다가 말주변은 어찌 그리 좋은지 항상 주변에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인기가 있었다. 나 역시 그를 보자마자 눈길이 갔다. 어쩜 저렇게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 총명하고 잘생기고, 다 가졌네. 

그런 그와 연애를 시작하며 나는 더없이 행복했다. 


아주 잠깐 동안 말이다. 


사람은 겪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라고 했던가. 어떤 사람이든 겉에서 보면 다 그럴싸해 보이는 법이다. 자신을 포장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바닥을 보이는 건 궁지에 몰렸을 때, 예를 들면 도박에서 전 재산을 잃었다든가 하는 그런 국면일 것이다.


처음 카지노를 갔던 건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한국 나이로 스물셋. 이제 막 만으로 스물 한 살이 된 나는 그와 함께 처음으로 멜버른에 있는 크라운 카지노(Crown Casino)를 방문했다.  그때까지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도박장은 어두컴컴하고 음산한 분위기였던 데 비해, 그곳은 활기가 넘치고 반짝반짝 거리며 맛있는 술과 흥에 겨운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크라운 호텔과 함께 운영되는 그곳은 샤넬이나 페라가모 같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럭셔리 부티크들로 가득했고, 입구에 들어서면 늘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 CK의 향이 풍겼다. 카지노는 그런 호텔 중앙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카지노를 구경 시켜 주며 룰을 설명해주었다. 생전 처음 도박장에 간 나는 눈이 돌아갈 것처럼 번쩍이는 기계와 룰렛 소리, 사람들의 환호성에 섞여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게다가 카지노는 너무 커서 금방이라도 길을 잃을 것 같았다. 그는 아주 간단한 카지노 워(Casino war)부터 21 영화를 봤다면 누구나 알고 있는 블랙잭까지 다양한 게임을 보여주었다. 나는 최소 배팅금액만큼만 걸고서 한두 번 깔짝깔짝해보았지만 이기고 지는 것과 관계없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게임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얼마나 해야 이 페이스에 익숙해지는 걸까? 눈앞에서 순식간에 돈이 불어나고, 사라졌다. 


비록 게임을 즐기지는 못했지만, 카지노는 퍽 흥미로운 곳이었다. 그 문을 통과하는 순간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파티라도 가는 것처럼 드레스를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쭉 들어선 명품 부티크, 고급 대리석과 골드 빛으로 가득한 그곳은 마치 어린 시절 한 번쯤 상상했던 환상의 세계에 가까웠다. 그 분위기가 좋아서 우리는 아주 가끔 밥을 먹으러 게임을 구경하러, 카지노에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바카라(Baccarat)라는 게임에서 반드시 이기는 필승법을 생각해냈다며 나를 데리고 바카라 기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직접 플레이를 하지 않고 판에 돈만 걸 수 있는 시스템이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내게 자신의 필승법을 공개했다. 


"늘 잃은 돈의 두 배를 거는 거야. 이길 때까지 그걸 반복하는 거지. 그럼 절대 지지 않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럴 듯했다. 바카라는 플레이어(Player)와 딜러(dealer) 둘 중 하나가 이기는 게임이었다. 이겼을 경우 판돈의 두 배를 주고, 비길 경우에는 판 돈을 돌려준다. 그러니 만약 진 후에 두 배를 계속 건다면 분명 언젠가는 이길 터였다. 

그는 곧 자신의 필승법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최소 배팅금은 $5. 지면 다시 $10, $20, $40 순으로 돈을 걸었다. 그러다 이기면 다시 판돈을 줄여 이길 때까지 두 배를 거는 걸 반복했다. 과정은 조금 지루했지만, 돈은 금세 불어났다. 그는 한시간도 채 되지 않아 $300으로 $700을 만들었다. 

이게 정말 되는 건가? 눈으로 보고서도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분명 돈은 불어나고 있는데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저 운이 대체 언제까지 이어질까. 나는 그에게 이제 많이 땄으니 돌아가자고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밤이 지나 새벽이 되도록 그는 배팅을 멈추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저쪽에서 기계나 구경하며 그를 기다렸다. 두리번거리다 다시 그 자리에 가보았지만, 그는 없었다. 대체 어디서 놀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기다리는데 그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왔어? 어디 갔었어? 이제 돌아갈까?"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카지노에 들어온 지 다섯 시간. 게임이고 뭐고 집에 가서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퀭한 눈을 하고 나를 보며 말했다.


"돈 좀 빌려줘."


그는 내게 $300만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면 다시 원금을 찾을 수 있다고. 알고 보니 그는 가져온 돈을 모두 탕진하고 통장에 있는 돈을 빼다 쓴 것도 모자라, 셰어하우스에 사는 사람들에게 선불로 받은 집세까지 모두 잃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거절했다. 


"너, 제정신 아니야. 그만 포기하고 집에 가자."


그러자 그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돈을 잃은 게 다 나 때문이라며. 중간에 집에 가자는 나와 말다툼을 해서 기분이 안 좋아 침착하게 배팅을 하지 못한 탓이라고. 


아아. 빚에 쫓기면,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이런 모습이 되는구나. 


그런 이야기가 있다. 마약쟁이에게 도박을 알려주면 마약을 끊고 도박을 한다고. 도박이 이토록 무섭다. 희망 고문이라는 말이 이토록 딱 맞는 게임이 또 있을까. 내 재산을 단번에 불려줄 것 처럼, 원금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처럼, 한 번만. 한 번만. 그렇게 전 재산 탕진하고 나서야, 아니 탕진하고도 끝나지 않는 도박.


그는 다음 날, 그는 정신을 차린 듯 내게 사과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비슷한 일은 그 후에도 몇 번 반복되었고, 그가 도박을 끊었을 때, 이미 관계는 돌이킬 수 없었다. 달라지겠다, 앞으로 잘하겠다 말하는 그를 나는 더는 믿을 수 없었다. 


그 후 나는 몇 년 동안 카지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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