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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Jul 19. 2021

물어보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더 혼란스러워졌다.

나라고 처음부터 몸이 부서져라 도전하고 최선을 다해 길을 찾았던 건 아니다. 내게도 안일하고 방자했던 시기가 있었다. 세상이 내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내가 맘껏 떼를 쓰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이라는 그늘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그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고 처음 알았다. 


“그럼 호주에는 혼자 온 거에요? 쉽지 않았을 탠데..”

그는 무척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을 것 같았어요. 사람은 좀 볼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반성해야겠네요.”

살면서 이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대다수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는 온실 속에 화초, 영어로는 spoiled child 라고 한다. 넉넉한 부모님 밑에서 고생이라고는 모른 채, 제멋대로 살아왔을 것 같다는 의미다. 나는 와인을 조금 마시고 대답했다.

“한국에서는 그랬죠.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거짓말이다. 지금도 힘들다. 하지만 나 힘들다 광고해서 무엇 하랴. Spoiled child가 좋은 말은 아니지만, 꼭 나쁜 말도 아니다. 그만큼 애지중지 자란, 귀한 아이라는 뜻이니까. 


우리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화인 한 병과 치즈 플레이트 하나를 먹어 치웠다. 적당히 향긋하고 씁쓸한 와인과 느끼한 치즈는 정말 환상의 궁합이다. 일종의 치맥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이번에는 제가 살게요, 저 돈 많아요.”

계산하려는 그를 저지하며 그렇게 말하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아주 넉넉한 건 아니었지만 밥 한 끼도 못 살 정도는 아니었으니, 꼭 거짓말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여러 번 얻어먹은 터라 왠지 모르게 빚지는 느낌이 들었다. 돈이 없을지언정, 마음은 편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식당을 나와 트램(Tram, 전차) 정류장까지 걸었다. 아까 마신 와인 때문인지 취기가 올라왔다. 딱 한 번 갔던 그 와인바는 다양한 와인과 치즈를 취급하고 있었는데, 처음 먹어본 염소 치즈가 맛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 


“또 봐요.”

헤어질 때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특별히 다음 약속을 잡는 것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는 사이도 아닌데, 친한 듯 친하지 않은 듯, 그는 잊을만하면 불쑥 나를 찾아왔다. 지나가는 길에 시간이 나 들렀다던가 일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얼굴이나 볼까 하는 그런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내게 그 뻔한 수작 한번 걸지 않고, 되려 가까스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 끼니를 걱정하고, 안부를 묻는 그가 싫지 않았지만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이 사람은 도대체 뭘 원하는 걸까. 친구라기에는 달달하고, 썸이라고 하기에는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질 않았다.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어 연락이 뜸해지면 꼭 먼저 연락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가 일을 마치고 불쑥 찾아왔을 때, 나는 혼자 추측하느니 물어보자는 마음으로 던졌다. 

“오빠는 저랑 뭘 하고 싶어요?”

그는 잠시 나를 빤히 보다 말했다.

“본인이 원하는 거 다 해주고 싶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물어보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나와 딱히 나와 연애를 하고 싶다거나 내게 뭘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좋은 사람 같고,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해주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다. 여자로 보는 것도 아닌데, 내게 뭐든 해주고 싶다는 이 남자. 

그 후로, 나는 그를 ‘키다리 아저씨’라 저장했다. 이성으로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원하는 걸 하게 해주고 싶다니 딱 키다리아저씨가 아닌가! 


그런데, 주디와 키다리 아저씨는 결국 어떻게 됐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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