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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Oct 10. 2023

인공지능 생성 모델과 문맹과 손글씨

한글날에 할머니가 남긴 것

딥러닝을 이용하면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그림을 그리거나 손글씨를 쓸 수도 있다. 얼마전부터 그 기법 중 하나인 '갠(GAN) 모델' 만드는 걸 배우고 있다. 직역하면 생성형 대립 네트워크(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 한국어로는 적대적 생성 신경망이라고 불리는데, 아직 입문 단계라 그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모른다.


GAN 모식도 @Thalles' blog


삐뚤빼뚤한 손글씨를 수만장 집어넣고, 원하는 숫자나 글자를 요청하면 비슷하게 흉내를 낸다. 물론 그 흉내의 결과는 사람의 손글씨와 비슷하다. 어쨌든 그건 누군가가 실제로 쓴 것이 아니라,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짜’다.


가짜 글씨라고 생각을 하고 봐서 그런지, 어쩐지 인공지능이 만들어냈다는 글씨는 유달리 못생겨 뵌다. 그리고 그 못생긴 글씨를 들여다보면서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할머니의 손글씨


숫자를 잘 쓰지 못했던 할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손으로 써둔 전화번호부를 갖고 계셨다. 내 기억으로 그 전화번호부는 뒷면에 무슨 정체불명의 지자체 행사 포스터 같은게 박혀 있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판촉용 무선 노트였다.


노트 안에는 할머니가 손수 쓴 아들, 딸, 손자녀 집의 전화번호가 있었는데, 대부분은 할머니가 직접 써서 무척 삐뚤빼뚤했다. 몇 개는 다른 가족들이 써 줘서 모양이 비교적 정연했지만 그건 할머니가 주로 보는 페이지의 번호는 아니었다.


할머니 손글씨 실력이 형편없었던 것은 수전증 때문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이었다. 가족들이 몇 차례 노력해서 숫자까지는 알려드렸다. 그리고 할머니가 숫자 쓰기 연습을 하실 겸 합심해서 전화번호부를 만들어드리는 것으로 가족들의 교습은 끝이 났다. 


그걸로 할머니가 자기 방에 있는 전화로 대구나 서울에 있는 손아랫것들에게 전화를 하실 수 있게 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글을 모르는 바보

할머니는 종종 자기 처지가 못마땅할때면 “내가 글을 모르는 바보래서…”로 시작하는 푸념을 늘어놓곤 하셨다. (뭐 그런 걸로 서글픈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그런 말들을 하실 때 나이가 6학년 졸업반 즈음이셨으니 사실 그때라도 모시고 사는 가족들이 나서서 한글을 떼실 수 있게 해드렸다면,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교사인 할머니의 아들도, 명문대학을 다니는 손자들도 그 문제를 모른 척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글을 모른다고 해서 할머니 포함 가족들이 함께 사는 데에 큰 문제가 없었고 할머니도 가끔 푸념을 하시는 것만 빼면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셨다고, 그 핑계대로, 그냥 그랬던 거라고 믿고 싶다.


1925년생이신 할머니는 올해로 아슬아슬하게 백수를 앞두고 계셨다.


기이하게도 한글날인 어제 소천한 고인은 나는 잘 모르는 이유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촌골에서 태어난 장옥이 여사는 소학교를 중퇴하고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 지독한 가난으로 아주 이른 나이에 집을 떠나 식모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 집에서 아이를 둘 낳았지만 얼마뒤 그곳을 떠나야 했고, 한국전 종전 직후 자식을 낳아줄 젊은 여자를 찾고 있었던 집에 후처로 들어와 자식을 넷 낳았다.


후처로 들어온 집에서 낳은 첫째아들이 장성한 후 1982년에 결혼했고, 그가 다시 아들을 둘 두었는데, 그 중 둘째가 이 글을 쓰고 있다.



식자들 틈에 낀 문맹


최근에 나는 퇴사 후 모종의 이유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최첨단의 기술인 인공지능과 딥러닝을 배우고 있지만, 너무 늦게 배운 것은 아닌지,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할머니가 말한 “글 모르는 바보"의 처지도 비슷한 느낌이었을까?


내가 후회하는 것은 중증 치매로 요양병원에 계시는 동안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않은 것이 아니다. 최근 나는 결혼 문제로 부모와 독립전쟁을 치르고 ‘이러니 출생률이 이 지경이지'라는 생각으로 입가에 풀칠하느라 돈 필요할때만 원가정을 찾는(=카톡을 하는) 나 자신을 몹시 사랑스럽게 느끼고 있다. 치매를 앓기 시작한 할머니를 자주 뵙지 못한 것에도 후회는 없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이런저런 핑계로 연휴 뒤에야 빈소로 귀향중인 열차에서 내가 할머니한테 거듭 죄송한 부분은 글을 알려드리지 못한 거다. 전공수업에서 늦은 나이에 글을 깨치게 된 할머니들 이야기를 숱하게 읽었다. 그때 이미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는 살아는 있지만 돌아가신 것과 비슷한 상태여서 어찌할 수가 없었고, 후회는 종종 쓰나미처럼 달려온다.


그때에, 그 이전에, 혹은 내가 훨씬 더 어렸을 적인 할머니가 쓰실 전화번호부를 만들던 그 날에 내가 뭘 할 수 있었겠나 싶고 그 기억으로부터 계속 도망치고 싶다. 할머니는 한 생을 ‘식자들 틈에 낀 문맹’의 처지로, 불안과 불만을 마음 속에 ‘적대적으로 생성’하셨을 거다.



할머니의 유산

우리는 실용적인 이유로 많은 것을 배우고, 그래서 교육은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비즈니스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요즈음엔 교육이 그 자체로 사람을 위로해주는 경우는 많지가 않고 소중하다. 그걸 알면서도 외면했던 까닭에, ‘글 모르는 바보'로 스스로를 여기곤 했던 할머니의 여생을 위로할 기회를 드리지 않은 것이 내 커리어의 못 지울 오점이 되었다.


할머니가 세상에 남기신 글자는 본인 전용 전화번호부의 삐뚤빼뚤한 숫자 몇 개가 전부다. 


앞으로 살면서 뭐 이것저것 남겨보겠다고 애를 쓰겠지만, 내 뇌리엔 이젠 어디 있는지도 모를 판촉용 노트와 할머니 손글씨만 영원히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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