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의 토요일 오후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다행히 밀리지는 않았다) 주말 출근 염불을 외면서 거의 반나절을 보내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읽고 있었다. 이 글은 책 소개는 아니다. 다만 '하루키'와 '잡문'이라는 단어가 '주말 오후'의 대명사로 글 서두의 분위기로 쓰기에는 더없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굳이 시기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20년 전 그러니까 고등학생 시절의 느낌으로는 시간이 흐르면 세상이 어느 정도 틀이 잡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나이를 먹을만큼 먹은 나이가 되면 세상에 물론 여전히 모순은 있겠으나 뭔가 여러가지로 훨씬 나아져서 해볼만 하지 않을까, 그런 류의 희망을 품고 있었을 거다.
시간은 꽤 흘렀으나, 세상은 '이 지경'이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니게 되었다. 나는 매일 거울 속에서 그 흔적들을 살피다 출근을 하고, 퇴근 길에 'OOO이 말하는 저출생의 원인' 같은 영상의 썸네일을 주워넘기고는 주머니 속에 스마트폰을 집어넣는다. 영상 볼 시간 따위는 없다.
배우자를 찾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가족 계획을 세운다는 건 꽤 낭만적으로 들리는 구석이 있다. 적어도 내가 부모님 혹은 앞세대를 떠올릴 때에는 그런 느낌이 남아 있다. 헌데 이젠 어쩌다 주변 사람들과 그런 주제를 이야기할 때면, 바로 그 재생산이라는 문제 자체를 나 개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절멸과 관련지어서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특정한 세대의 문제가 아니고, 한국만의 문제도 당연히 아니다. 인류의 '이 지경'에 관한 문제다. <잡문집>에서 쪽수가 가장 큰 장은 '음악'인데 막상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재즈에 관한 글이다. 그리고 나는 재즈를 잘 모르고, 어느 정도로 모르냐면 재즈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디 스터디 까페 배경음악으로 틀어두는 용도가 먼저 떠오르는 정도다. 하루키의 글을 읽다 보면 재즈는 음악의 한 갈래라기보다는 한 세계에 가깝게 느껴지는데, 그 정도 사이즈를 알고 즐기려면 영화 한두편 보겠다는 심정으로는 어림도 없고, 작정하고 몇 년을 들여야 겨우 입문이 가능한 무언가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 세계의 인류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이 지경>인데 재즈를 들을 수가 있단 말인가?'
뭐 그런 생각으로 잡문집을 넘기다가 심경을 남기려 컴퓨터를 켰다.
그대들은 어떻게 사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그리고('그러나'가 아니다) 나는 사람을 만나러 직장을 제외하곤 집 밖을 벗어나고 싶은 의지가 들지 않는다. 해마다 가일층 두꺼워지는 여름의 무게는 기후위기가 곧 사회성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새 마음이론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산더미를 좀 치우러 출근하러 간다. 토요일 오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