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에세이 #1_서점 여행
2013년 12월 22일, 나는 타이베이에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허리를 구부린 채 저녁 군을 붙잡고 타이베이 시 뒷골목을 어기적어기적 걸었다. 배가 너무 아팠다. 걸어다니기가 힘들 정도라서, '아, 그냥 포기하고 싶어. 호텔로 돌아가서 누워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틀 전 저녁으로 먹은 토마토소고기국수가 문제였다. 그날 밤에는 침대가 흔들리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고 다음 날부터 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저녁 군의 손을 붙잡고 계속 걸었다. 비가 오고 있었지만 다행히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날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고 우리는 꼭 가야 할 곳이 있었다.
타이베이 시 한적한 골목에 자리 잡은 작은 서점, VVG Something. 우리는 이 서점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학산문화사 2013)에서 처음 보았다. 이런 소개글을 읽고 타이베이에 왔는데 어떻게 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가게 안으로 보이는 좁고 기다란 선반 위에는 핸드메이드 천 가방이며 축하 엽서, 목공예 스탬프, 사탕이 담긴 틴케이스, 성냥갑, 조리도구, 작은 탁상용 빗자루, 빨간 연필과 붓 같은 소소한 추억이 깃든 소품을 놓고, 그 사이사이에 크기와 테마 별로 대강 분류한 책이 놓여 있다. 소품과 잘 어울리게끔 진열해놓으니, 책들도 마치 '내가 있을 곳은 바로 여기'라는 걸 아는 양 편안해 보인다.
_<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그리고 우리는 도착했다. 정말 작고, 꽉 찬 이곳에.
여기 놓인 책들은 정말 이렇게 느끼는 것 같았다.
"내가 있을 곳은 바로 여기야."
나도 이 책들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 내가 있을 곳은 여기고,
이 작은 곳이 지치고 아팠던 내 시간들을 충분히 보상해줄 거라고.
정말 그랬다.
사진에 찍힌 것이 이 서점의 거의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작은 공간에서, 저녁 군과 나는 두 시간 정도 머물렀다. 작은 카운터에 앉은 직원은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고, 실은 우리도 그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커피를 한 잔 마셨던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저녁 군이 화장실에 다녀왔던 건 기억이 난다. 나는 의자에 앉아 뒤틀리는 위를 움켜쥔 채 책과 문구와 작은 접시와 기념품들 사이를 마치 새로운 우주라도 되는 듯 탐색했고, 저녁 군도 나와 비슷했다. 가끔 내지르는 짧은 감탄사에 우리는 서로 무엇을 찾았는지 보려고 잠깐 만났다가, 다시 헤어져서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한국으로 가지고 돌아갈 물건들을 고르는 데 전념했다.
분명, 내가 아는 책들이 많았다. 골동품과 작은 유리 접시 들, 정교한 문구류도 일본에서 많이 보던 것, 새롭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훨씬 멋지게 보였고 그래서 나는 조바심이 났다. 그동안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이 더 있을까봐. 이 서점에서 발견하지 못하면 영영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외면해버리게 될까봐. 그 작은 우주 안에서.
내가 고른 검정 가죽 수첩, 저녁 군이 고른 핸드메이드 나무 자와 책. 책을 한두 권은 더 샀던 것 같은데 지금 당장 기억나는 것은 이 세 가지다. 수첩은 아까워서 아직도 쓰지 못했고 나무 자는 한국으로 돌아와 가끔 저녁 군을 놀려댈 때 썼다. 대만에 가서 이런 영국 자를 사 왔다면서. 그리고 중국 소설가 장아이링(張愛玲)의 작고 아름다운 드로잉북. 저녁 군은 어떻게 이런 책을 찾았는지!
<색, 계> <반생연>의 작가 장아이링. 영화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정작 원작자의 이름은 우리나라에선 낯설기만 하다. 실은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이라고 한다. 대만에서는 루쉰과 비견될 정도. 1936년에서 46년까지 십여 년 동안 상하이에 살면서 그녀가 그린 그림이 이 손바닥만 한 책 속에 차곡차곡 담겨 있다. <색, 계>와 <반생연> 모두 아주 좋아하는 영화이긴 하지만, 나는 장아이링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런데도 괜히 이 책이 귀하게 느껴진다. 한 장, 한 장 아껴서 보고 있다.
브런치 첫 글을 쓰자, 했을 때 왜 이 타이베이의 작은 서점과 작은 책이 무작정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읽었던, 앞으로 읽게 될 수많은 그림책들 가운데서도 문득, 귀하게 여겨져 다시 보게 될 그런 책들에 대해 쓰고 싶다고. 정처 없이 떠다니는 먼지였다가도 어느 날은 내 삶과 타인의 삶에서 한번 반짝이는 별이 될, 그런 책들로 가득한 작은 우주가 내 안에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