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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지 Feb 13. 2017

근사한 상상

<마지막 휴양지>



아무래도 오래전 이야기를 들려드려야 할 것 같아요.

어느 여름날, 친구와 강화도로 짧은 여행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맛있는 비빔밥을 먹고 연꽃이 잔뜩 피어난 정원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어요. 전등사를 구경하고 해안 도로를 달렸어요.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어둑어둑해지는 바다를 구경했지요.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배가 고팠고 길은 조금씩 어두워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작정 해안 도로를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내비게이션은 돌아가야 할 숙소와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고 우리에게 계속 경고음을 날렸지만, 왠지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길이 우리에게 그대로 계속 달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요. 결국 해가 수평선에 걸리기 전, 우리는 바닷가에 덩그러니 서 있는 어떤 레스토랑 앞에 차를 멈추었습니다.

레스토랑 문 앞에 걸려 있는 메뉴판을 읽었을 때부터, 우리는 이 저녁식사가 일종의 모험이 될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어요. 메뉴판에 손글씨로 이런 메뉴가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식 스파게티

함박스테이크

생선구이 정식


스파게티와 생선구이 정식을 함께 파는 집이라니! 레스토랑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80년대 한국영화에나 나올 법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귀에는 익숙하지만 결코 제목은 알 수 없는, 일종의 경음악? 깨끗하게 앞치마를 입은 아주머니와 머리를 곱게 말아올린 할머니가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죄송해요, 잘못 찾아왔네요" 하고 말하며 돌아서고 싶었지만, 그 두 사람의 간절한 눈빛에 우리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그날 저녁의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인 것 같았거든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자, 우리는 정말 80년대 영화 속 한 장면으로 걸어들어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체크무늬 비닐 테이블보, 그 위에 수줍게 놓인 빨간색 가짜 장미꽃, 현란한 무늬의 작은 공단 의자, '금성'이라는 마크가 달린 에어컨. 그 옛날의 경양식집! 하지만 왠지 모든 게 유쾌하고 즐겁게 여겨졌습니다. 소나무숲 너머 바닷가에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는 모습이 창문으로 보였고, 낡은 레스토랑 건물은 어떤 애틋한 사연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애피타이저로 오뚜기 크림수프와 다디단 모닝빵과 딸기잼이 나왔고, 스파게티와 함박스테이크는 그야말로 엄마가 집에서 만들어준 것 같은 맛이었지만 즐겁고 맛있는 저녁식사였지요. 그리고 우리는 정말 그 저녁의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계속 우리 옆을 서성이면서 스파게티가 맛있는지 묻고, 스파게티에 들어간 방울토마토는 밭에서 직접 딴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어요. 우리는 그 방울토마토가 정말 맛있다고 했고, 결국 후식으로 방울토마토 한 접시와 할머니가 서툰 솜씨로 직접 내린 드립커피를 받았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 길었습니다. 이렇게 멀리까지 왔구나, 하면서 심지어 주유소에도 들렀지요.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무리겠지? 하지만 진짜 즐거운 식사였어,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요. 그날 밤, 책을 읽는 친구 옆에 누워 있던 나는 갑자기 근사한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어떤 레스토랑에 대한 신기하고 재미있는 상상이었지요. 나는 생각나는 대로 미친듯이 적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정말 근사한 상상이고, 곧 멋진 이야기가 되겠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나는 그 멋진 상상이 적힌 수첩을 다른 수첩과 함께 책장에 꽂아놓았습니다. 머릿속이 잘 정리되면 다시 펼쳐서 이야기를 완성하려고요. 이제는 그 수첩이 수많은(아시겠지만 저는 수첩이 진짜 많아요) 수첩들 중 무엇이었는지 헷갈려서 찾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날 밤 내 머릿속에 찾아왔던 근사한 상상은 다시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여, 추억이란 낡은 모자일 뿐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새 신발이지. 
새 신발을 잃어버렸다면 가서 찾아보는 수밖에 달리 무슨 수가 있을까?


<마지막 휴양지>(로베르토 인노첸티 그림, 존 패트릭 루이스 글, 비룡소>


어느 나른한 오후, 내가 지루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내 상상력은 무시당하는 게 분했던지 휴가를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화가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살아갈까? 나는 붓과 삼각대를 내던지고 가방을 꾸려 내 작은 집의 문을 잠갔다. 왠지 내 빨간 자동차는 길을 아는 것 같았다. 부르릉 소리를 내며 막히는 도로를 달리더니 '어딘지아무도몰라' 마을에 이르렀다.





아침이 되자, 호텔 프런트에 있는 앵무새가 이렇게 조잘거렸다.
"우리 호텔 손님들은 모두 이상한 것을 찾고 있어요. 당신은 무슨 이상한 것을 찾고 있죠?"
'이상한 것이라고?'
산책을 나가면서 내게도 평범하지 않은 어떤 것, 정말 특별한 어떤 것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그게 대체 뭐지?


도망가버린 그날의 내 상상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저는 이 책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습니다. ''잃어버린 상상력을 찾아서 여행을 떠나는 상상'이라니, 정말 근사한 상상이야!' 하고 생각하면서요. 솔직히 말하자면 '존 패트릭 루이스와 인노첸티는 그 상상을 붙잡아서 이렇게 멋진 책으로 완성했는데, 나는 뭐람. 이런 게 거장과 평범한 한 인간의 차이겠지.' 하고 조금 투덜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 책을 읽고 나면 꼭 무언가를 쓸 수 있겠다는, 당장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놀랍지 않나요? 






"나는 여기서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긴 것을 찾아냈다고 쓰세요. 내가 찾는 이상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답을 찾았다고요. 그건 바로 마음속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었어요!"



어제, 원고를 한 줄도 쓸 수 없을 것 같아 두렵다고 했던 언니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 역시 이날의 근사한 상상은 여전히 노트에만 간직해두었을 뿐, 그 뒤로 어떤 이야기도 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능력, 제가 언제나 글을 쓰면서도 스스로 믿지 못했던 그 능력을 이제는 조금은 믿게 되었다면 놀라실까요? 그건 저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연습에 대한 믿음에 더 가깝습니다. 쓰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하고, 자꾸 연습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근육이 마음에 자리잡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그저 무작정 쓰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무 글자라도, 어떤 단어라도 쓰다 보면 언젠가는 제 마음속 근육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는 단단한 마음을 가지려 합니다. 그러니 언니도 마음속 근육을 믿으세요. 제 것보다 더 튼튼하고 훨씬 더 오래된 근육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자꾸만 허물어지는 마음을 단단하게 빚는 일은 왜 이리도 어려울까요? 지금도 허물어져 있을 언니께 저의 근사한 상상과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그림책과 이 편지를 보냅니다.





H 언니를 응원하며

최은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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