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자신만의 무대에 선다

by 슬로렙


새벽 4시, 스마트폰의 진동에 눈을 뜬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뜨고, 시간을 보고서 일어난다. 찬물로 잠을 깨운다. 옷을 입고 어젯밤에 싸놓은 가방을 다시 한번 열어본다. 이윽고 현관에 이르러 신발을 신고 일어서면, 문에 적힌 문장이 보인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아리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여느 공연 동아리들이 그렇듯이 보컬과 어쿠스틱 기타 플레이어는 넘쳐나지만, 베이스 기타 플레이어는 항상 적었다. 공연을 준비할 때마다 베이스 기타를 연주할 사람이 모자랐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도 베이스를 칠 사람이 없었고 결국은 내가 한 곡을 담당하게 되었다. 다행히 어려운 곡은 아니었다. 열을 올리는 기타와 보컬을 다른 세상에서 바라보며 여유롭게 연습을 함께했다. 이윽고 공연 당일 호기롭게 자리 잡고 연주를 했다. 하지만, 사고는 늘 방심할 때 일어난다고 했던가.


1절, 후렴, 2절, 후렴...

자, 이제 클라이막스! 둥둥둥둥 둥둥둥둥... 어, 왜 다들 2절이야?


1분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딴생각을 하다가 시간을 뛰어넘어버린 것이다. 혼자 폭주해 버린 무대를 마치고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하필 또 그때부터 영상은 왜 남기기로 했는지, 갑자기 벙찐 얼굴로 다른 세션과 악보를 쳐다보는 나를 보는 또 다른 벙찐 나. 정말 부끄러워 창문을 뚫고 뛰어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실수한 게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 누구도 무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황스럽고 부끄러워도, 어설픔을 숨기지 못했어도, 어떻게든 끝까지 해내고 무대를 내려왔다.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종종 삶이 하나의 무대같다는 생각을 한다. 올라간 기억이 없는데 이미 그 한 가운데 서 있는 무대. 도와주던 감독들도 사라져 어느샌가 홀로 모든 것을 해내야만 하는 무대.


이 무대에서는 온갖 일이 일어난다. 신기하게도 비바람이 몰아치기도 한다. 때로는 햇살이 비추기도 한다. 감당하지 못할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고 행복한 일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의 올라섬과 넘어짐, 나아감과 멈춤, 기쁨과 슬픔, 삼키고 뱉는 일들. 모든 일이 일어난다. 오롯이 나에게 오가는 일들이 그곳에 있다.


친밀한 이들은 종종 무대를 찾아와 즐겁게 떠들고 눈물을 나누기도 하지만 잠시 함께할 뿐, 금세 그들의 무대로 다시 떠난다. 그렇게 누군가는 영영 사라지기도, 누군가는 또 돌아오기도 한다. 그들과 나의 시간이 쌓이고 쌓인 흔적만이 남고, 무대는 점점 혼자만의 세계가 된다.


그곳에는 관객들도 있다. 강한 조명에 가려진 그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되는지 어떤 사람들인지도 알 수 없다. 그들은 때로 환호하고 응원을 보내기도 하지만, 나와는 관계없이 끼리끼리 떠들기도 하고, 어딘가로 사라지기도 한다. 반복되는 요란함과 정적이 그들이 있음을 그저 짐작하게 한다.


모두가 자신만의 무대에 서 있다. 자신을 지나가는 이들과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이들 가운데 홀로 서 있다.


삶은 무대와 같다. 멈추고 싶어도 이제 더는 멈출 수 없는 공연이 이어지는 무대. 내가 주연이고, 조연이며 연출, 조명, 음악을 모두 해내야만 하는 무대. 쓰러진 척을 할 순 있어도 쓰러질 수는 없는 무대. 오롯이 나 자신으로서 홀로 감당해야 하는 무대.


많이 슬프기도 했다. 아프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당황스럽기도 했으며, 뛰어내리고 싶기도 했다.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드러눕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무작위로 반복되는 이곳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무대 위의 삶을 받아들인다. 스쳐 가는 인연들에 감사하고, 관객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도 그들의 무대를 짊어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 없더라도 우리는 개별자로서 서로의 존재를 알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음을 안다. 더 이상 뛰쳐나가고 싶다고 외치지 않는다. 그렇게 무대 위에서 살아간다.


새벽 4시 반 현관 앞,

신발을 신고 발을 한 번 굴러보고,

무거운 가방을 다시 고쳐 매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

문을 본다.


THE SHOW MUST GO ON


문을 연다.

이제 다시 걸을 때다.

문장의 잔상이 일렁이다 곧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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