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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Nov 01. 2019

지구소녀의 가슴에 남은 1984년

이티

영화 ‘이티’ 스틸컷./ 사진제공=UIP코리아

1984년. 드디어! 열 살이 됐다. 일의 자리 인생에서 십의 자리 인생으로 넘어갔다. 2014년 1월 1일, 열 살이 된 나의 아들은 패기 넘치게 “나는 10대다!”라고 외쳤다. 그렇지만 1984년의 나는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어린이라고 다 같은 어린이인 것이 아니라 좀 특별한 어린이가 되었노라고.       


그 특별함에 정점을 찍어 준 사람은 외숙이었다. 사촌언니를 데리고 극장에 가려던 외숙은 한 동네에 살아서 제집처럼 드나들던 조카의 표까지 챙겼다. 첫 극장은 첫 놀이동산만큼이나 신세계였다. 고개를 몇 번 돌려야 채워질 것 같은 어마어마한 화면과 귓속까지 쿵쿵 파고드는 사운드 그리고 상상으로만 만났던 외계인이 실재했다. 나의 운명적인 첫 영화는 바로 ‘이티( E.T. : The Extra-Terrestrial)’였다.                

 

일행과 떨어져서 지구에 남겨진 E.T.는 특유의 기다란 손가락으로 먼저 등장한다.  E.T.와 엘리엇(헨리 토마스 분)과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둘은 전혀 다른 모습임에도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향해 비명을 내지른다. 다시금 둘은 마주하게 되고, 이내 다른 공간에서도 서로의 감정을 느끼는 ‘우리’가 된다. 그래서 집 냉장고에 있던 술을 꺼내 마신 E.T.의 알딸딸한 취기가 학교 실험실에 있는 엘리엇에게 이어지며 귀여운 개구리 키스 소동이 펼쳐진다.     


E.T.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있었으니, 엘리엇의 동생인 거티 역을 맡은 드루 배리모어다. 헤어스타일도 얼굴도 마론인형에 조금도 꿀리지 않는 어여쁜 금발 소녀는 외계인만큼이나 놀라운 존재였다. 영화를 본 후 드루 배리모어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한동안 종이에 그리고 또 그렸던 기억이 있다.       


‘이티’에는 소녀 감성인 엘리엇의 엄마를 제외하고는 어른들의 얼굴이 제대로 담기지 않는다. 인트로에서 철렁거리는 열쇠 더미로 존재감을 뿜던 케이스(피터 코요테 분)도 영화 시작 후 80분이 지나서야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껏 등장하지 않았던 어른들의 얼굴이 화면을 채우는 시점은 E.T.의 생명이 위태로울 즈음인 후반부다. ‘이티’는 아이들의 눈높이로 그려지는 세계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바람처럼 오롯이 어린이를 위한 영화인 것이다.     


SF 영화는 특수효과 같은 볼거리도 중요하지만 서사에도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가상의 세계가 설득력을 지닌다. ‘이티’에는 너무도 유명한 자전거 비행 신이 두 차례 있다. 첫 비행은 뭉클함을, 두 번째 비행은 뭉클함에 스릴까지 선사한다. 그리고 두 번째 자전거 비행 앞에 배치된 추격 신에서는 아이들을 대신하는, 아이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성인 스턴트맨이 등장하지만 이 또한 유쾌히 넘길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내내 엘리엇의 가족은 샐리라는 여자와 함께 멕시코로 떠난 아빠를 그리워한다. 미지의 별에서도 E.T.를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장치다. 결국 미지의 누군가는 E.T.를 데리러 다시 지구를 찾아온다. 이별의 순간을 맞은 엘리엇은 E.T.를 가지 말라며 붙든다. E.T.는 그런 엘리엇의 이마를 가리키며 말한다. “I'll be right here.”      


1984년의 나는 E.T.와 함께였다. 당시 동네 문방구들은 물건을 사면 그림칩이라는 이름으로 스티커를 지급했다. 100개를 모으면 300원짜리 학용품과 교환할 수도 있었다. 나중에 생긴 마징가문방구가 훨씬 핫했지만, 그림칩 모음판에 그려진 E.T.가 좋아서 늘 88문방구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만 팔던, 조악할지라도 E.T.가 그려진 문구류는 매번 설렜다. 산울림의 김창완이 만든 노래 ‘외계인 이티’를 입에 달고 살았다. ‘식빵같이 생긴 이티의 머리 하하하하 우스워~ 송아질 닮았네 이티의 눈은 하하하하 귀여워~ 이티 이티 외계인 이티~ 이티 이티 내 친구 이티~’     


열 살의 나는 ABC크래커로 알파벳 대문자를 익혔다. 그래서 엘리엇이 붙인 E.T.라는 이름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이름에 숨겨진 의미를 알고 싶지가 않았다. 엘리엇의 친구이지만 이제 내 친구이기도 한 E.T.를 신비로이 남겨두고 싶었다. 엘리엇은 그믐달이 뜬 밤에 E.T를 만나서 보름달이 뜬 밤에 떠나보냈다. 차마 E.T를 떠나보내지 못했던 열 살의 나는 평범한 동네 소녀에서 비범한 지구 소녀가 되어서 무지개 포물선을 그리며 은하계를 날고 있었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https://entertain.naver.com/series/read?cid=1080122&oid=312&aid=0000328275

*텐아시아에 실린 칼럼을 다듬어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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