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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Nov 05. 2019

일상이 詩가 되는 순간들

패터슨

영화 ‘패터슨’ 스틸컷./ 사진제공=그린나래미디어

이따금 글을 쓰는 즐거움을 잃고 헤맬 때가 있다. 그럴 때 습관적으로 찾게 되는 책이나 영화가 있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읽거나 제인 캠피온의 ‘내 책상 위의 천사’(1990)를 보면 길을 찾은 안도감에 젖는다. 지금 이후로는 짐 자무시의 ‘패터슨’(2016)에게 긴 시간을 의지하지 싶다. 다만 아쉬운 점은 영화 내내 참 읽고 싶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번역본이 국내에는 단 한권도 없다는 것이다. ‘패터슨’에 나오는 대사처럼 번역이란 비옷을 입고 샤워하는 것처럼 아쉬운 대목이 있을 수 있으나 남루한 영어 실력인 나에게는 그 비옷이 간절한 데 말이다.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애덤 드라이버 분)의 이야기다. 지도에서 패터슨의 위치를 한번 찾아봤다. 미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지방 소도시 같기도 했던 도시 패터슨이 궁금했던 까닭이다. 영화를 보고 지도까지 검색한 도시는 처음이다. 짐 자무시처럼 도시 패터슨의 비범한 매력에 취한 듯싶다.      


시를 쓰는 패터슨은 휴대폰을 거부하고 일상에 집중한다. 버스에 탄 승객부터 거의 매일 출석하는 단골 술집의 사람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 분)의 말에 눈과 귀를 연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패터슨과 주변 인물간의 대화는 그들의 표정이 그려질 만큼 또렷하다.      


매일 마주하는 일상은 그의 노트에 시로 담기면서 특별한 리듬이 생긴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이 비범한 시로 치환된다. 그 노트가 패터슨의 또 다른 가족인 잉글리쉬 불독 마빈 덕분에 유에서 무가 되는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다. 그러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팬인 일본인 시인이 패터슨에게 노트를 한 권 선물하면서 시의 서광이 보인다. 새 노트에 담긴 패터슨의 마지막 시 한 소절은 정녕 최고다.      


‘패터슨’에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빼곡하게 등장한다. 패터슨의 아내 로라는 원, 빗살, 눈 무늬를 사랑하기에 자신만의 시그니처처럼 집 안 구석구석 드리워 놓는다. 심지어 아침마다 패터슨이 먹는 시리얼도 링 형태의 원이다. 단연코 로라의 선택일 것이다. 신스틸러 불독 마빈은 가장 큰 웃음을, 숱하게 등장하는 남녀노소 쌍둥이들은 후렴구처럼 운율을, 술집 주인과 단골들은 무대의 소극처럼 적절한 웃음을 선사한다.   


눈에 익은 커플이 버스 승객으로 등장한다. 영화 ‘문라이즈 킹덤’(2012)의 소년 소녀 샘과 수지, 즉 자레드 길먼과 카라 헤이워드다. ‘패터슨’에서는 무정부주의자로서 연인보다는 먼 친구보다는 가까운 관계로 등장한다. 나는 그만 반가운 마음에 오래된 지인을 만날 때처럼 손을 살짝 들고 “어”를 외쳤다. 사실 얼마 전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2017)를 볼 때도 요다가 등장한 순간에 같은 실수를 범했다. 격하게 몰입한 나의 양옆에 앉았던 분들께 이 지면을 빌어서 사과를 드린다.        


나의 딸 이름은 시오다. 한자로는 詩悟로 시를 깨닫는다는 뜻이다. 원래 딸에게 주려던, 이름 속에 새기고 싶은 한자는 詩䎸였다. 시를 듣는다는 뜻으로 시가 들리는 삶이란 얼마나 근사할까 싶어서 스스로의 선택에 서슴없이 탄복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이름으로 쓸 수 없는 한자였던 것이다. 그래도 이름에 ‘詩’를 새겨준 덕분인지 10살 딸은 일기를 시처럼 쓴다. 일상이 시가 되는 것이다. 그저 초등학생이지만 어찌 보면 어린 패터슨인 것이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304871

*텐아시아에 실린 칼럼을 다듬어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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