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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Oct 22. 2020

진득한 반죽으로 빚어진 캐릭터가 엉겨붙다

소리도 없이

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컷./ 사진제공=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이 글에는 ‘소리도 없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범죄극으로 짐작되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흥건한 피가 아닌 진득한 흙이 스크린을 뚝뚝 채우는 작품이었다. 영화의 제목은 바로 ‘소리도 없이’다.


말이 없는 태인(유아인 분)과 다리를 저는 창복(유재명 분)은 낡은 트럭을 몰며 계란을 파는 장사꾼들이다. 그러고는 ‘성실한 땀방울, 내일의 미소’라는 그림을 앞에 두고 헤어 캡과 고무장갑, 고무장화, 비옷 차림으로 환복한다. 두 남자는 피범벅이 된 한 사내를 천장에 매달고, 바닥에는 비닐을 넓게 깐 후 고문 도구를 성심껏 세팅하고 범죄 조직원을 친절한 미소로 응대한다. 그들은 조직원에 의해 싸늘한 주검이 된 사내를 야산에 묻는다. 심지어 창복은 명복도 빌어 준다. 그렇게 두 남자는 범죄 조직의 뒤처리를 담당하는 청소부도 업으로 삼고 있다.      


범죄 조직의 실장(임강성 분)이 창복에게 사람 하나를 며칠만 맡아줄 것을 제안한다. 창복은 세상 떠난 사람들만 모신다는 원칙을 깨고 꺼림직한 제안을 받아들인다. “아니 앤 겨? 맡아달라고 한 사람이?” 창복과 태인은 맡아야 할 상대가 열한 살 소녀 초희(문승아 분)라는 사실에 아연하다. 계획에 없던 유괴범이 된 그들에게 초희가 참담히 묻는다. “아저씨 저 죽여요?”     


‘소리도 없이’는 홍의정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고전소설 ‘별주부전’의 원형에서 태동한 이야기는 머리는 버리고 꼬리는 끊어버린다는 거두절미(去頭截尾)라는 말이 단박에 떠오를 만큼 핵심에만 집중한다. 범죄극의 단골 소재를 끌어왔지만 푸근한 시골을 배경으로 삼고 피와 폭력이 난무하지 않는다. 범죄극의 낯익은 큰길이 아니라 낯선 샛길로 질주한다. 주요한 장치로 사용되는 인물의 과거 역시 걷어낸다. 태인이 말이 없거나 창복이 다리를 절뚝이는 사연 그리고 두 남자의 오랜 인연에 대한 부분마저도. 경찰은 의뭉스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범죄에 몸담고 있는 이들은 순박한 얼굴로 등장한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선량한 얼굴로 불량한 행동을 일삼는 인물들을 보면서 선의와 악의, 즉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진다.     


매사에 감사하는 창복은 주일성수가 중요하고 태인에게 기도 테이프를 들으라고 권할 만큼 독실한 신앙인이다. 결국 ‘편안히 하늘로’라는 문구 아래에서 창복은 불편하게 죽어가는데 아이러니하다. 유재명은 말이 없는 태인의 곁에서 말이 넘치는 창복의 모습으로 든든하게 영화를 품었다. 기이한 토끼 가면을 쓰고 첫 등장하는 초희는 태인의 일상에 자신의 존재를 심는다. 상다리가 하나 없는 밥상을 다시 펼치듯. 초희는 스스럼없이 피를 흙으로 덮고, 막대기로 핏자국 옆에 꽃잎을 그려 넣는다. 초희는 언제 자신을 해할지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별주부전’의 영민한 토끼처럼 행동한다. 아역 배우 문승아는 열한 살 소녀 초희의 미묘한 감정선을 잘 살렸다.      


태인은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진종일 집을 지키는, “배고파”가 입에 붙은 동생 문주(이가은 분)와 다를 바 없는 애어른이다. 차만 타면 떡실신하듯 졸고, 동네 할머니의 손에 계란을 쥐여 주지만 고마움의 악수는 냉큼 뿌리친다. 말이 없는 태인의 언어는 바로 표정과 몸짓이다. 태인 역을 위해 체중을 무려 15kg 증량한 유아인은 소리를 지운 자리에 감정을 빼곡히 채우지 않고 외려 덜어냈다. 인기척을 대신하는 박수 소리가 진동한다. 태인이 무언가를 탐하기 시작하면서 생겨나는 감정들로 울울해진다. 세상의 선뜩한 냉기를 온몸으로 받아낸 태인의 처참한 포효가 소리 없이도 생생히 전해진다.     


‘소리도 없이’는 진득한 반죽으로 빚어진 캐릭터가 엉겨붙는 작품이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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