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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Nov 04. 2020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들, 번쩍번쩍 세상을 들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깨끗하게 맑게 자신있게’. 존슨앤존슨 화장품의 유명한 카피다. 학창 시절 야무진 카피에 이끌려서 해당 제품을 구매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정작 나는 듣기만 해도 배가 부른 든든한 말이었다. 성경에서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사춘기 여드름 소녀가 세상을 가르며 나아가는 느낌이랄까. 여하간 나에게 힘을 북돋는 한마디였다.


1995년 을지로. ‘삼진그룹’의 8년차 사원 생산관리3부 이자영(고아성 분)과 마케팅부 정유나(이솜 분), 회계부 심보람(박혜수 분)은 대한민국 최고의 회사의 커리어우먼들이다. 그러나 현실은 주요 업무에서 배제된 잔업 전담이다. 상사들의 입맛에 맞는 모닝커피를 세팅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사무실 청소를 하고, 심지어 구두와 담배 심부름까지 도맡는다. 사측에서 상고 출신으로 승진이 막힌 그들에게 대리 승진을 조건으로 토익 600점 이상을 제안한다. 자영은 도로시, 유나는 미쉘, 보람은 실비아라는 이름으로 사내에서 개설한 ‘영어토익반’에 들어간다.


옥주 공장으로 외근을 나간 자영은 우연히 폐수가 방류되는 광경을 목격한다. 회사에서도 조사에 착수하지만 자영은 안전하다고 결론지은 사측의 마무리가 왠지 석연치 않다. 자영은 회사에서 애초 수질검사를 의뢰했던 대학교를 몰래 찾아간다. 그리고 대학 내 대자보의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우리들이 행동해야 합니다’라는 문구를 보고 더이상 진실에 눈감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마케팅부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갈취 당하던 유나와 회계부에서 가짜 영수증으로 숫자로 거짓말했던 그래서 숫자에게 못내 미안했던 보람도 동참한다. 세 사람은 조작된 수질검사와 이 모든 것을 은밀히 지시한 누군가를 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선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영화 첫머리에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했음을 일러둔다. 연출을 맡은 이종필 감독은 “영화의 초고를 쓴 홍수영 작가가 실제로 1990년대 모 기업에서 고졸 사원을 대상으로 토익 강사를 한 적이 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1991년에 있었던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도 이 작품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1995년인 만큼 감성 돋는 복고풍 아이템이 망라된다. 블루 블랙 헤어, 곱창밴드, 갈매기 눈썹, 어깨를 한껏 강조한 의상과 그룹의 아침 체조도.      


영화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미는 자영, 유나, 보람 역의 고아성, 이솜, 박혜수의 케미스트리가 일품이다. 자영을 선배로 예우하는 최동수 대리 역의 조현철과 말기암에 걸려서도 보람을 살뜰히 챙기는 봉현철 부장 역의 김종수, “어제의 너보다 오늘 더 성장했어”로 직원을 독려하는 반은경 부장 역의 배해선, “Of course”를 좋아하는 애연가 송소라 사원 역의 이주영도 영화 전체를 든든하게 아우르는 존재들이다.


자영(도로시: 유나만 꼭 ‘도로띠’라고 부른다)은 아삭한 사과를 좋아하고, 오지랖이 넓지만 주위를 긍정으로 물들이는 오지라퍼다. 유나(미쉘)는 자릿한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직설적이지만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즉 스스로를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다. 보람(실비아)은 올림피아드 우승 출신의 수학 천재로 노래 부르기가 좋고 친구들과 함께라면 더 좋은 순수한 사람이다. 셋 중 누구 하나를 콕 집을 수 없을 만큼 각각의 매력이 넘쳐난다.      


‘삼진그룹’으로 출발한 영화는 ‘영어토익반’으로 마무리된다. 출근해서 고졸임을 드러내는 불편한 삼진그룹 유니폼으로 환복하고 밥값을 아끼려고 집밥 도시락을 꺼내는 그들의 희로애락은 선명하다. 또한 귀에 쏙쏙 박히는 영어와 메시지는 우리를 그들의 옆에 서게 한다. 후반부가 조금 느슨하게 진행되어도 우리에게 끝까지 응원하게 만드는 의리를 끌어낸다. 극 중에서 억지로 웃는 것이 싫었던 보람과 달리 관객은 자연스레 웃음이 터진다. 엔딩 크레딧을 8비트 게임 스타일로 만들었기에 끝까지 객석을 지키면 보너스를 누릴 수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들이 번쩍번쩍 세상을 든다. 깨끗하게 밝게 자신있게!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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