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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Dec 22. 2020

하나의 심장으로 뛰게 하는 벅찬 이름

에놀라 홈즈

영화 ‘에놀라 홈즈’ 스틸컷./ 사진제공=넷플릭스

*이 글에는 ‘에놀라 홈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일상이 와르르 무너진 올해, 우리집 남매가 꼬옥 붙들고 있는 존재들이 있다. 중학생 아들은 종합 게임 스트리머 우왁굳의 영상을 들이밀면서 초등학생 딸은 웹소설 ‘아기는 악당을 키운다’의 주인공 르블레인의 매력을 열거하면서 자신들이 열렬히 응원하는 캐릭터에 내가 입문하기를 권한다. 아이들의 열정에서 초등학생이었던 나의 어느 순간이 두둥실 떠오른다.
 
그 무렵의 나는 계림문고에서 출간된 코난 도일의 ‘명탐정 호움즈’ 시리즈에 폭 빠져 있었다. 내가 가진 책은 고작 2권이었지만 시리즈의 다른 책을 가진 급우들과 책을 맞바꿔 읽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책을 건넬 때 끈끈한 눈빛도 덧붙여 교환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의 우리는 호움즈의 조수이자 친구인 와트슨이었다. 우리는 하나의 심장으로 뛰고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에놀라 홈즈(밀리 바비 브라운 분)는 엄마 유도리아 버넷 홈즈(헬레나 본햄 카터 분)와 늘 함께다. 그렇지만 유도리아는 에놀라와 모든 것을 공유하진 않는다. 평범한 엄마가 아니었던 유도리아는 에놀라에게 독서, 역사, 물리, 화학, 양봉, 양궁, 펜싱, 테니스, 주짓수, 체스를 몸소 가르친다. 그리고 에놀라의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운다. “넌 혼자서도 아주 잘할 거야, 에놀라.”
 
에놀라의 열여섯 번째 생일날, 딸의 전부였던 엄마가 사라진다. 낱말 퍼즐 애호가인 유도리아가 직접 만든 꽃말 카드만 생일 선물로 남긴 채로. 에놀라에게는 낯설기만한 큰오빠 마이크로프트 홈즈(샘 클라플린 분)와 작은오빠 셜록 홈즈(헨리 카빌 분)가 런던에서 찾아온다. 마이크로프트는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을 읽는 어머니를 정신이 나갔거나 노망이 났다고 일축한다. 마이크로프트는 위험천만한 어머니가 길러낸 천방지축 에놀라에게 확고한 훈육이 필요하다며 신부 수업이 목적인 여자 기숙 학교에 보내기로 결론짓는다. 에놀라는 셜록의 사건에 관한 기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스크랩할 만큼 동경한다. 그래서 자신의 천재 오빠가 엄마의 실종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기를 기대한다. 셜록은 어머니가 이유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면서 에놀라에게 남아있는 단서를 찾아보라고 권한다. 그러면 머지않아 진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에놀라는 설록이 어린 시절 입던 옷을 입고 유도리아를 찾으러 런던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상원 활동을 앞두고 벼랑 끝의 위험에 처한 소년 후작 튜크스베리(루이 패트리지 분)를 돕는다. 에놀라는 모든 이가 투표권을 갖는 선거법 개정안이 쟁점으로 부각한 런던에서 유도리아가 세상을 바꾸려고 투쟁하는 서프러제트(여성 참정권 운동가)임을 알게 된다. 셜록은 유도리아의 서프러제트 동료인 이디스(수전 워코마 분)를 찾아간다. 이디스는 미스터리만 관심권인 셜록에게 일침을 놓는다. “당신은 권력 없이 사는 인생이 어떤 건지 모르죠. 당신은 정치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요. 왜냐하면 당신은 세상을 바꾸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에요. 본인에겐 이미 딱 좋은 세상이라서.”
 
넷플릭스의 ‘에놀라 홈즈(Enola Holmes)’는 낸시 스프링어가 쓴 동명의 청소년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총 여섯 권의 ‘에놀라 홈즈’ 시리즈 중에서 첫 번째 이야기인 ‘사라진 후작’을 근간으로 한다. 해리 브래드비어 감독의 ‘에놀라 홈즈’는 셜록의 소중한 여동생 에놀라를 앞세운다. 셜록이 주인공인 ‘셜록 홈즈’가 추리물이라면, 에놀라가 주인공인 ‘에놀라 홈즈’는 모험물이자 성장물이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에서 ‘음악’이라는 붓으로 형형색색의 그림을 그려냈던 다니엘 펨버턴은 이번 작품에서도 음악으로 경쾌한 필치를 더했다.
 
홈즈 가의 안주인인 유도리아와 그녀의 덩굴로 덮인 집은 닮았다. 자유롭고 거침없는 유도리아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판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린 딸 에놀라가 양모로 둘둘 만 솔방울을 ‘대시’라고 부르며 어디든 끌고 다녔던 과거를 현재까지 품어주는 감상적인 엄마이기도 하다. 또한 에놀라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딸의 미래를 예단하지 않는 현명한 엄마이기도 하다. 그래서 에놀라에게 엄마는 위험천만한 사람이 아니라 대단한 사람이다. 사라 가브론의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를 추천하는 바다. 헬레나 본햄 카터는 이 작품에서도 서프러제트로 열연하는데 ‘에놀라 홈즈’의 시대상이나 주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의 매력 넘치는 초능력 소녀 일레븐을 연기한 밀리 바비 브라운은 ‘에놀라 홈즈’에서는 배우로서뿐 아니라 제작에도 이름을 올렸다. 밀리 바비 브라운은 스크린에 허무맹랑한 옷 속에 갇혀 살기는 싫은 에놀라 홈즈로 완벽하게 등장한다. 에놀라는 강제로 입어야 하는 여자들에게는 억압의 상징인 고래수염 코르셋을 자의로 입고 보호구처럼 다양하게 활용하기도 한다. 또한 캐리커쳐와 변장에 능하고, 겹겹이 꼬아놓은 암호를 만들고 또 해독하고, 사선을 넘나드는 순간에도 물러서지 않고 맨주먹 대결을 벌일 만큼 기지를 발휘하고, 총기 있고, 대담무쌍한 소녀다. 밀리 바비 브라운이 빚어낸 사랑스러운 에놀라가 스크린을 향해 속닥이거나 웃거나 의견이나 동의를 구할 때마다 관객의 심장도 쿵쿵 뛴다.
 
명탐정 셜록의 여동생인 에놀라는 탐정이자 암호 해독가이자 길 잃은 어린 양을 연민하는 그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한 소녀다. 그래서 영어 단어 ‘ALONE’을 거꾸로 조합한 이름인 에놀라(ENOLA)의 홀로서기는 각별하게 다가온다. 에놀라는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기에 앞으로 펼쳐질 미래 역시 스스로에게 달려 있음을 아는 명민한 소녀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으면 깊이 빠져드는 에놀라의 취향이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 것이다.
 
에놀라 홈즈. 보는 이로 하여금 한마음이 되어 파이팅을 외치게 하는 벅찬 이름이다. 하나의 심장으로 뛰게 하는 이름이다. 극 중에도 나오는 대사지만 나 역시 에놀라에게 꼭 해주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
 
“에놀라, 넌 혼자가 아니야.”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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