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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Dec 22. 2020

두터운 원작의 문장들 속에 자신의 문장을 꾹꾹 심어내다

작은 아씨들

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컷./ 사진제공=소니픽쳐스

* 글에는 ‘작은 아씨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릴 적 나를 왈칵 끌어당기는 가족이 있었다. 루이자 메이 올컷이 쓴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의 마치 가족이다. 마치 가의 네 자매는 유독 케미가 좋고, 가난할지언정 생각이 풍요로운 부모가 있고, 집안에는 예술적인 흥취가 넘실거린다. 나는 이 가족 특유의 온기가 참 좋았다. 그래서 마지막 책장에 이르면 내내 따스하게 피어오르던 불씨가 훅 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마다 나는 이내 책의 첫 장으로 조르르 돌아가곤 했다. 그레타 거윅의 영화 ‘작은 아씨들’ 또한 그러했다. 라스트 신과 마주하려니 이내 첫 신이 그리워졌다.

미국 뉴욕의 어느 신문사 앞, 마치 가 네 자매의 둘째 조(시얼샤 로넌 분)는 숨을 고르며 긴장을 떨쳐 내고는 안으로 들어선다. 조는 편집장 대쉬우드(트레이시 레츠 분)에게 자신의 원고를 친구의 것인 양 둔갑시키고 익명으로 발표할 것을 제안한다. 대쉬우드는 대놓고 짧고 자극적인 원고를 주문한다. 아울러 주인공이 여자면 꼭 결혼을 시키라고도. 사실 조는 콩코드의 가족을 위해서 돈벌이가 절실하다. 그래서 작가로, 하숙집의 가정교사로 투잡을 뛰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보러 간 조는 같은 하숙의 독일인 교수 프리드리히(루이 가렐 분)와 마주친다. 그날 밤, 프리드리히는 조의 방 앞에 셰익스피어의 책꾸러미와 편지 한 통을 두고 간다. ‘다락방의 작가님에게. 오늘 연극을 즐기는 것을 보고 이 책을 주고 싶었어요. 당신이 인물을 연구하고 펜으로 그들의 색을 입히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후 조의 원고를 읽은 프리드리히는 일침을 놓는다. 잘 팔리는 글이 좋은 글은 아니라고. 그간 궁핍한 생활에서는 돈이 궁극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따독이던 조는 비감에 잠긴다.   


쌍둥이 남매의 어머니인 첫째 메그(에마 왓슨 분)는 남편 존(제임스 노턴 분)의 박봉으로 바듯이 살아가지만 부부는 정이 두텁다. 어느 날 메그는 값비싼 실크에 홀려서 충동구매를 한다. 메그는 존에게 모두 털어놓지만 말끝에 가난이 지겹노라 푸념을 하고야 만다. 메그는 경솔한 발언에 대해 막바로 사과하지만 존의 얼굴은 그늘진다.

성홍열로 심장이 약해진 셋째 베스(엘리자 스캔런 분)에게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어머니 마미(로라 던 분)로부터 베스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고향집으로 황황히 돌아온 조는 슬픔으로 미어진다. 긴긴날을 아프고 또 아팠던 베스는 죽음마저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베스는 글을 쓰는 일을 주저하는 조에게 청한다. 언니가 쓴 이야기가 제일 좋다고, 자신이 떠난 후에도 자매의 이야기를 계속 써달라고.      

프랑스 파리, 대고모(메릴 스트립 분)의 동행으로 선택된 막내 에이미(플로렌스 퓨 분)는 미술 공부를 하고 있다. 혹여 자신 때문에 소중한 기회를 놓칠까 저어한 베스의 배려로 에이미는 언니가 위중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대고모는 에이미에게 빈번히 일깨운다. 너는 너희 가족의 희망이므로 언니들을 챙기고, 부모를 부양하고, 결혼을 잘해야 한다고. 마치 정답지인 양 부요한 집안 자제와의 약혼을 권한다. 그러나 에이미는 사랑만큼은 자신이 선택하고 싶다. 에이미는 낯선 타국에서 해후한 로리(티모테 샬라메 분)가 눈물겹도록 반갑지만 조에게 실연을 당한 일로 젊음을 낭비하는 것을 호되게 나무란다. 로리는 실의에 빠져서 그림을 접겠다는 에이미에게 마지막으로 초상화를 한 점 부탁한다.      

마치 가 네 자매와 로리의 인연은 7년 전 매사추세츠주의 콩코드에서 시작한다. 새해 전야 무도회에 간 조는 메그의 제지로 휘파람, 악수, 뒷짐과 “맙소사” “끝내준다” 등의 입버릇처럼 하는 말도 봉인 당하고 치마를 태워 먹어서 댄스도 여의치 않다. 조는 우연히 유럽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로리와 마주친다. 둘은 파티에서 겉돌던 차에 금세 가까워져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흥 넘치는 댄스까지 춘다. 작은 구두 때문에 발목이 삔 메그는 옆집 소년 로리의 신세를 지게 된다. 로리는 왁자지껄한 마치 가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조는 로리에게 스스럼없이 말한다. “테디라고 불러도 돼?”      

온정이 넘치는 마미는 가난한 험멜 가족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침 식사를 양보하자고 제안한다. 네 자매는 기꺼이 어머니의 뜻을 따르고 험멜 가족의 집으로 향한다. 꽁꽁 얼어붙은 몸으로 집에 돌아온 그들에게 로리의 할아버지 로렌스(크리스 쿠퍼 분)가 보낸 뜨뜻한 만찬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가에 도착한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전쟁터에 나간 그리운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온다.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2019)은 루이자 메이 올컷의 동명의 소설 ‘작은 아씨들’(1869)을 원작으로 한다. 미국 남북전쟁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원작은 기나긴 세월 영화와 TV 드라마, 뮤지컬, 오페라 등으로 변주되면서 한곁같은 사랑을 받아 온 작품이다. 그레타 거윅은 연대기 순인 원작과 달리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구성으로 인물의 농축된 감정을 빚어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의 알렉상드르 데스플라는 포근포근한 음악으로 서사를 부드럽게 안착시켰다. ‘안나 카레니나’(2012) ‘미녀와 야수’(2017)의 재클린 듀런은 시대상과 인물상을 헤아린 의상으로 인물에 색을 입혔다. 지난달 열렸던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상을 수상했다.

원작에서 인상적이었던 페이지는 스크린에서도 차르륵 펼쳐진다. 전작 ‘레이디 버드’(2017)에서 필력으로도 연출력으로도 수려한 솜씨를 뽐냈던 그레타 거윅이 공력을 들인 까닭이다. 새해 전야 무도회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조와 로리의 댄스, 네 자매의 달콤한 복수극 공연, 에이미의 석고로 굳어버린 발, 다락방의 비밀 클럽, 조와 베스의 마지막 바다 나들이는 소설 속 문장을 뚫고 나온 신이다. 그레타 거윅은 “‘작은 아씨들’은 주체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찾아가는 젊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로,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필요한 이야기다”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연기를 좋아하는 메그, 글쓰기를 좋아하는 조,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는 베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에이미의 인생 여정은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레타 거윅 특유의 위트까지 더해진 영화는 시종여일 유쾌하다.

조가 집필한 극본을 무대로 옮겼을 때 가장 빛나던 메그는 존과 결혼한다. 무대가 아니라 한 남자와의 삶을 택한 것이다. 메그는 다른 동생들과 달리 상심에 빠진 조의 마음을 쓰다듬는다. “내 꿈이 네 꿈과 다르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난 집과 가족을 갖고 싶어. 기쁘게 일하고 싸워 나갈 거야.” 조는 이렇게 유년 시절의 꿈이 끝나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메그는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인다. “이건 해피엔딩이야.”

또래 소녀들이 드레스를 탐할 때 책을 탐하던 조는 울부짖는다. 여자에게도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고, 외모만이 아니라 야심과 재능이 있다고. 조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판치고, 편견이 넘치는 사회의 벽을 훌쩍 뛰어넘고자 한다. 그래서 제대로 된 결말은 팔리는 결말이라며 잇속만 챙기는 편집장에 맞서 자신의 원고에 대한 판권을 지킨다. 작가로서뿐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치는 교사로서도 탁월한 조는 대고모가 물려준 저택을 조카 데이지를 포함한 소녀들의 미래를 위한 학교로 바꾸고자 한다. 조는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권을 다른 이의 손에 쥐여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가슴 뛰는 선택들로 채워진다.     

베스는 천성적으로 수줍음이 많다. 그러나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조가 다락방의 비밀 클럽 신입 회원으로 로리를 추천할 때도 갸웃하는 자매들과 달리 베스는 단박에 답한다. “로리잖아.” 늘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서는 베스도 성큼 앞으로 나서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피아노를 향할 때다. 베스의 피아노는 적요가 감돌던 로렌스 집안을 채우고 베스를 닮은 죽은 딸을 못내 그리던 로렌스의 마음까지 위무한다. 마미가 집을 비울 동안에도 베스는 자매들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진 험멜 가족을 홀로 챙긴다. 베스는 늘 가족 안에서 꿈을 찾았다. 그저 가족이 함께하고, 가족을 위해서 건반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그래서 남겨진 가족들에게 베스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에이미는 세계 최고의 화가를 꿈꾸던 소녀다. 조가 그 포부를 비웃자 에이미는 왜 꿈을 창피해야 하냐고 올차게 되묻는다. 에이미는 옆집 오빠 로리에게 첫눈에 반한다. 급우들에게 진 라임 빚 때문에 선생의 캐리커처를 그렸다가 체벌을 받은 에이미가 로리에게 울먹거리며 토로할 때도 자매 중 가장 작고 고운 발을 가졌음을 어필한다. 바닷가로 나들이를 갔을 적에도 에이미는 남몰래 화폭에 로리를 담아내고, 로리에게 자신의 예쁜 발을 석고로 떠서 선물할 기발한 생각까지 품는다. 매사 똑 부러지는 에이미는 어중간한 재능의 결말인 흔하디흔한 화가가 되고 싶지 않다. 마침내 로리와 남녀로서 마주하는 순간에도 언니의 대역 취급이라면 거절하겠노라 한다.      

로리는 조를 처음 본 그날부터 쭉 사랑을 키워 왔다. 기실 로리와 조는 허물없이 양복 조끼를 번갈아 입을 만큼, 등 뒤로 몰래 술잔을 주고받을 만큼 각별난 우정을 자랑하는 관계다. 허나 조는 로리의 청혼만큼은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널 사랑할 수 없다고, 우리가 결혼하면 비극이라고, 난 결혼은 안 한다고, 이대로의 내가 좋다고, 서둘러 포기하기에는 이 자유가 너무 좋다고. 조의 한마디 한마디가 불덩이가 되어 로리의 심장은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오랜 사랑이 좌절된 로리는 헛헛한 마음에 유럽으로 떠난다. 훗날 너무도 외로운 조에게 누군가의 사랑이 간절해지는 순간이 찾아오지만 이제 로리의 심장에는 다른 사람이 깃들어 있다.           

결혼이 경제적인 거래였던 시대에 여성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마미는 네 자매에게 결혼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대고모와 달리 여자들도 세상에 나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미는 밤중에 빵을 굽는 유별난 취미를 가졌고, 누구와도 격의 없이 대화하고, 도움을 청하는 손길에는 아낌없이 내어 주는 사람이다. 네 자매에게도 마미는 가장 큰 의지처다. 또한 마미는 사고 치는데 일가견이 있는 딸들에게 맞춤형 충고를 한다. 특히 에이미가 얼음물에 빠진 것에 깊은 책임을 느끼는 조에게는 울림 있는 조언을 건넨다. “넌 날 닮았어. 나도 거의 매일 화가 나. 인내심 많은 천성은 아니야. 40년째 노력하며 배우고 있지. 분노에 내 좋은 면이 잠식되지 않게. 어떤 천성들은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단다.”     

‘작은 아씨들’은 인물과 그 인물을 연기한 배우들이 오색영롱하게 피어오르는 작품이다. 시얼샤 로넌은 어떠한 시공간에 놓여져도 거기서 태어나서 쭉 자라 온 것처럼 인물에 섞여 들어가는 배우다. ‘레이디 버드’에 이어 이번 작품을 함께한 그레타 거윅의 서사 안에서는 더더욱 생기가 돈다. 시얼샤 로넌은 첫 등장부터 조의 심장으로 뛴다. 잉크로 얼룩진 손을 감추려는 순간에도, 원고료를 받은 기쁨에 사람들 사이로 경쾌하게 내달리는 동안에도, 고향집과 하숙집의 다락방에서 펜으로 사각사각 글을 쓰는 동안에도…. 시얼샤 로넌의 아이디어로 원작의 검은색 글쓰기용 앞치마가 군용 재킷으로 바뀌었는데 집필에 나서는 조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레이디 버드’에 이어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추는 티모테 샬라메와 시얼샤 로넌은 찰떡 호흡을 보여준다. 메그의 쌍둥이 남매인 데미와 데이지보다 더 쌍둥이스럽다고 할 만큼 닮아있다. 원작에서 마치 가의 네 자매만큼이나 사랑을 받아온 로리 역으로 퐁당 뛰어든 티모테 샬라메는 조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지언정 에이미와 관객의 마음만큼은 완벽하게 훔친다. 무구한 눈빛으로 배시시 웃는 것만으로도.

플로렌스 퓨가 빚어낸 당찬 에이미도 눈길을 끈다. 서로 다른 맥락에서 직설적인 에이미와 조의 케미가 진진하다. 조가 어머니의 여비를 마련하려고 싹둑 자른 머리카락 때문에 눈물을 쏟아낼 때 원작에서는 메그가 위로하지만 영화에서는 에이미가 토닥이며 달래는데 말맛이 쫄깃하다. 에마 왓슨과 엘리자 스캔런은 원작 속 메그와 베스의 매력을 한껏 살린다. 로라 던은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어머니인 에비게일의 모습이 담긴 마미를 촉촉한 감성으로 품어낸다. 메릴 스트립은 눈빛과 목소리만으로도 존재감을 빛낸다. 그래서 코까지 골며 낮잠을 즐기고, 자신의 코골이 소리에 깨고, 빈말도 금세 눈치채고, 입바른 독설가인 대고모는 흥미를 돋운다.

다락방에서 조는 군용 재킷을 다시 꺼내 입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잉크에 펜을 적시고, 손이 저리면 다른 손으로 펜을 들고 말이다. 다락방 바닥을 빼곡히 채울 만큼 길고 긴 네 자매의 인생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말로 혹은 몸으로 치고받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등을 돌리지 않고, 서로의 삶을 수놓는 네 자매의 이야기를.

그레타 거윅은 두터운 원작의 문장들 속에 자신의 문장을 꾹꾹 심어냈다. 원작의 매력을 휘발시키지 않은 채로. 그레타 거윅이 지핀 서사의 온기가 스크린을 휘감는다. 그래서 로리가 마치 가를 방문하고 나설 때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듯, 나는 다시금 극장으로 들어서고 싶어졌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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