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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Dec 22. 2020

주어(主語)가 되어 스크린을 휘감는 티모테 샬라메

더 킹: 헨리 5세

영화 ‘더 킹: 헨리 5세’ 포스터./ 사진제공=넷플릭스

*이 글에는 ‘더 킹: 헨리 5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의 열일곱 소년 엘리오(티모테 샬라메 분)는 스물넷 청년 올리버(아미 해머 분)를 흘끔거리기 시작한다. 1983년 이탈리아의 어느 눈부신 마을에서 소년의 찬란한 첫사랑이 시작된다. 엘리오는 자신의 본심에 흠칫 놀라기도 하고,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심장이 졸아들기도 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티모테 샬라메의 연기는 첫사랑의 순간을, 즉 소녀였던 나를 마주하게끔 했다. 그저 눈물만으로도 충분히 애틋했던 그 시절과 말이다. 신비롭게도 바싹 마른 시간 속에도 향기는 남아 있었다. 그렇게 나의 묵은 시간에도 향기가 일게 하는 놀라운 배우를 만났다.


그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작품들을 챙기게 되었다. ‘미스 스티븐스’(2016)의 빌리는 연기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무대에서 광채를 발하는 소년이다. 행동장애가 있는 빌리는 슬프지 않으려고 먹는 약이 모든 감정을 틀어막자 가없이 괴롭다. ‘레이디 버드’(2017)의 카일은 2002년의 새크라멘토에서 나쁜 남자, 즉 나쁜 소년이지만 소녀들이 그의 눈길을 뿌리치기란 불가하다. ‘핫 썸머 나이츠’(2018)의 다니엘은 1991년의 케이프 코드에서 무력한 일상에 묻혀 있다가 아슬한 일과 사랑에 빠져드는 웃자란 청년이고, ‘뷰티풀 보이’(2018)의 닉은 한심한 현실의 긴장감을 풀려다가 심각한 약물 중독자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른 청년이다. 이번에는 티모테 샬라메가 왕관의 무게를 감당하는 청년으로 스크린에 들어선다.


15세기 초 잉글랜드, 할(티모테 샬라메 분)은 부왕 헨리 4세(벤 멘델슨 분)와 오랜 불화로 척지고 있다. 할은 독재자인 아버지도, 아버지의 부질없는 야욕으로 이어지는 전쟁도 넌더리가 난다. 병색이 완연한 헨리 4세는 신하들까지 있는 공개적인 자리에 할을 불러서 왕위를 물려주지 않겠노라 쐐기를 박는다. ‘전하’라는 호칭에도 진저리를 낼 만큼 왕좌에는 뜻이 없는 할은 가난에 찌든 동네 이스트칩에서 주정뱅이 기사 존 폴스타프(조엘 에저턴 분)와 어울리며 술과 여색에 빠져서 하루하루를 견딘다.


할은 헨리 4세의 폭압에 불만을 품고 내란을 일으킨 기사 퍼시 핫스퍼(톰 글린카니 분)와 일대일 대결을 벌인다. 불필요한 반목을 피하고자 한 대결은 할의 승리로 끝나지만 살인이 그 무엇보다 영혼을 더럽히는 짓임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된다. 왕실 고문 윌리엄(숀 해리스 분)이 할의 처소로 찾아온다. 임종이 다가온 부왕이 후계자로 지목한 할의 동생 토마스가 죽었고, 왕의 부재 시에 폭발할 무질서를 언급한다. 궁전으로 간 할은 광기에 사로잡혀 잉글랜드에 혼란을 초래한 부왕을 찾으며 고함을 내지른다. “괴물은 어디 있나?”


스물여섯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할, 즉 헨리 5세에게 이웃 나라들로부터 경이롭고 진기한 즉위 선물이 쏟아진다. 프랑스의 왕세자(로버트 패틴슨 분)는 고작 테니스공이 전부인 무례한 선물을 보내온다. 윌리엄은 잉글랜드와 왕에 대한 모욕이라며 대응을 부추기지만, 헨리 5세는 사소한 자극에 호들갑 떨고 싶지 않다고 일축한다. 헨리 5세는 화해와 회유로 내란을 종식시키고 왕국에 평화가 깃들게 하고 싶을 따름이다.


프랑스의 왕명으로 헨리 5세를 죽이려던 암살자가 망명을 조건으로 자백을 해 온다. 윌리엄은 프랑스의 노골적인 도발을 묵인하면 위기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며 왕에게 결정을 재촉한다. 헨리 5세는 프랑스를 침공할 결단을 내리고 지휘관으로 기사 존을 불러들인다. 헨리 5세는 신하들에게 존을 ‘전쟁의 참혹한 얼굴을 본 사람으로서 전쟁을 존중하는 이’로 소개한다. 마침내 프랑스의 작은 마을 아쟁쿠르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전투가 시작된다. 존의 욱신거리는 무릎뼈가 예고한 것처럼 비가 세차게 쏟아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더 킹: 헨리 5세(The King)’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5세’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데이비드 미쇼 감독은 생지옥과도 같은 전투의 민낯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 병사들의 몸 위로 묵직하게 드리워지는 갑옷, 두텁고 질퍼덕거리는 진흙탕에서 미끄러지는 말,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강고한 화살비, 병사들을 짓누르는 고통이 화면에 섬광처럼 꽂힌다. 니콜라스 브리텔이 책임진 음악은 소년 합창단의 소리와 저음이 주를 이루는 현악 오케스트라로 청년 할에서 군주 헨리 5세로의 노정을 품는다. 또한 헨리 5세의 끈끈한 절친과 팽팽한 맞수 역할로 등장한 조엘 에저턴과 로버트 패틴슨의 농밀한 연기가 극을 견고하게 이끈다.


무릇 친구도 없이 추종자와 적만 득실거리는 왕에게도 진실의 목소리는 존재한다. 헨리 5세의 배필인 프랑스 공주 캐서린(릴리 로즈 뎁 분)은 어수룩하고 쉬이 기만당하는 남편의 기질을 직언하고, 헨리 5세의 여동생이자 덴마크 왕비인 필리파(토마신 맥켄지 분)는 왕에게 진실을 들려주지 않는 신하들을 유의하라고 충언한다. 헨리 5세에게 가족보다도 애틋했던 유일한 친구 존 폴스타프는 미언(微言)한다. 승리의 전율은 금세 사라지고 오래도록 남는 건 늘 추악한 것들이라고, 어떤 힘들이 왕을 전투로 이끌었는지 몰라도 병사들에겐 왕이 필요하다고, 왕의 자신감을 보여줘야 한다고,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웅대한 거짓말을 하라고.


티모테 샬라메는 ‘더 킹: 헨리 5세’에서  청년의 순수함과 이성을 잃고 권력자의 쓰디쓴 외로움을 맛보면서 서늘한 광기에 젖어드는 인물화를 거침없이 그려냈다. 옥죄는 왕관의 무게를 감내하는 청년의 혼돈을 눈빛에 아로새겼다. 전투의 출발점에 긴히 필요한 왕의 웅대한 거짓말도 병사들을 향한 독려로 묵직하게 빚어냈다.      


스크린에서 티모테 샬라메는 치명적인 존재감을 자랑한다. 마치 고대 신화의 신 같다고나 할까. 인간보다 더 풍부한 감성을 지닌 신이 슬쩍 인간 세상에 외출한 것 같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악보를 기보하면 음표들이 한 땀 한 땀 화면을 수놓고, 그가 책장을 넘기는 모습은 한 폭의 명화처럼 이미지화된다. 그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년부터 어두운 그늘 속으로 파고드는 청년까지 청춘의 불쑥거리는 감정의 결을, 진폭을 날카로이 담아낸다. 그가 비범한 숨결을 불어넣은 캐릭터는 이따금 관객의 감정과 감각, 경험으로 치환할 만큼 생동한다.


티모테 샬라메는 주어(主語)가 되어 스크린을 휘감는 문장을 남긴다. 차기작인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에서는 로리 로렌스 역인데 이 또한 기대치가 크다. 벌써 설렌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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