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하루
무심코 틀었던 케이블 채널에서 ‘하루’(2001)가 방영되고 있었다. 오래 전 내가 작업했던 영화를 마주하려니 졸업 앨범의 사진 속 나처럼 분명 나지만 동시에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문득 최근에 본 ‘최악의 하루’(2016)가 말풍선처럼 통통 떠올랐다.
주인공 은희를 맡은 한예리는 영롱하다. 그녀가 나온 영화나 드라마를 본 적이 있지만 내가 몰랐던 혹은 지나쳤던 그녀의 표정을 마주했다. 그녀는 미묘하게 다른 표정과 말투로 영화 속 세 명의 남자 뿐 아니라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사실 영화 속 은희의 상황은 영화 제목처럼 꿀꿀하기 그지없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남자를 하루 속에 담아놓으려니 부글부글 끓을밖에. 그러나 전체적으로 영화는 잘 깎은 연필로 사사삭 그려진 소묘처럼 집중력있고 경쾌하다. 그래서인지 극장을 나서면서도 못내 상큼하다.
‘최악의 하루’는 나에게 멋진 하루를 선물했다. 하정우 주연의 ‘멋진 하루’(2008)가 그랬던 것처럼. 하정우나 한예리라는 배우는 문장 부호마저도 제대로 연기로 표현한다. 그들의 차기작이 늘 기대되는 건, 최악의 하루일지도 모를 나의 어느 날이 멋진 하루로 마감될지 모르는 까닭이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208179
*텐아시아에 실린 칼럼을 다듬어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