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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Nov 24. 2019

지금, 덜 행복해지기 싫은 당신에게

왓 데이 해드

영화 ‘왓 데이 해드’ 스틸컷./ 사진제공=영화사 그램

*이 글에는 ‘왓 데이 해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눈보라가 치는 겨울밤, 알츠하이머를 앓는 루스(블리드 대너 분)가 사라진다. 남편 버트(로버트 포스터 분)는 그녀가 남긴 눈 위의 긴긴 발자국에 두려움이 앞선다. 버트로부터 연락을 받은 아들 니키(마이클 섀넌 분)가 한걸음에 달려오고, 멀리 사는 딸 비티(힐러리 스왱크 분)와 손녀 엠마(타이사 파미가 분)도 찾아온다.      


다행스레 루스가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지고, 의사는 가족에게 전문 시설을 권한다. 진즉에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예감했던 니키는 루스가 머무를 곳으로 시카고 최고의 기억 관리 센터라며 ‘추억의 이웃’ 요양원을 제안한다. 버트는 격노한다. 60년 동안 네 엄마의 기억 속에 난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고, 내가 최고의 기억 관리자라고, 사랑은 헌신이라고, ‘내 여자’라고….      


니키는 아버지 버트 전용으로 사이렌처럼 울리는 벨소리를 설정해 놓았다. 심장이 약한 아버지와 알츠하이머에 걸린 엄마를 위한 나름의 방책이자 헌신이다. 니키는 버트가 사장인지 바텐더인지 모르겠다며 자신의 일을 영 마뜩잖아 하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의 술집에 단 한 번도 발걸음하지 않는 것도. 니키는 버트의 농장 사진을 벽에 내건 술집에서 여동생 비티에게 인생 최고의 맨해튼(칵테일)을 선사한다. 비티와 엠마 모녀도 서로를 향해 날이 서 있기는 매한가지다.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비티는 기숙사에서 술 마시다 쫓겨난 것에 그치지 않고 학업마저 포기하려는 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엠마는 미친 듯이 감시하고 자신을 비정상으로 느껴지게 하는 엄마를 상대하기가 싫다.     


‘왓 데이 해드(What They Had)’의 연출을 맡은 엘리자베스 촘코는 “할머니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관해 절망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기쁘고 즐거운 순간이 있었고, 우리 가족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은 할머니가 알츠하이머를 겪는 순간에 생겨났다”고 했다. 배우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촘코는 데뷔작인 이번 작품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한 땀 한 땀 촘촘한 서사로 스크린에 수놓았다. 공감이 가는 캐릭터에 배우들의 능란한 연기가 더해져 실감나는 인물들로 빚어졌다. 특히 마이클 섀년은 특유의 아우라를 덜어내고 한껏 싱거운 인물로, 힐러리 스왱크는 특유의 강인함을 내려놓고 간신히 삶을 지탱하는 인물로 관객을 매료한다.   


작은 마을의 농장에서 자란 버트는 아이스크림 모임에서 만난 여인 루스가 평생의 사랑이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루스는 노인병 전문가로 30년 넘게 요양원에서 일했고 자신이 돌보았던 노인들의 일부처럼 알츠하이머에 걸렸다. 그녀는 손녀 엠마보다도 더 소녀스럽다. 루스의 취향을 존중하는, 루스 없이는 살 수 없는, 루스를 포기하지 않는 남편 버트가 있기 때문이다. 버트는 루스가 아끼는 블라우스를 드라이클리닝 해놓고, 그녀의 발에는 빨간 페디큐어를 해주고, 75세의 고령에도 지붕이 고장 난 컨버터블을 몬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결혼한 비티는 일찍이 한 남자의 아내와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매일매일 불면의 밤을 보내고, 달리고 또 달리는 그녀는 지금 더없이 쓸쓸하다. 루스가 비티에게 행복하냐고 툭 던지듯 묻자 딸은 아픈 엄마 앞에서 겨우 진심을 드러낸다. “외로워요.” 그래서 비티는 우연히 마주친 중학교 동창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자 술 한 잔에 용기를 불어넣고 자물쇠 작업을 핑계로 불러들이기도 한다. 죽기 살기로 감내한, 꾸역꾸역 되삼킨 비티의 삶은 엉망진창이다. 누군가는 알아채고 있다. 바로 비티와 치열히 갈등을 빚고 있는 딸 엠마다.  


버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스는 벌건 얼굴로 화를 자주 내던 늘 골칫거리였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루스에게는 기행과 횡설수설이 더해졌다. 루스는 집에서도 마치 유령처럼 떠돌고, 돌림노래처럼 각별했던 추억을 거듭 중얼거리고, 문득문득 정신이 돌아온다. 교회에서 손가락 욕을 하거나 성수를 마시고, 전화벨 소리에 전화기 대신 스테이플러를 들고, 불쑥 아기를 낳겠다고도 한다. 루스는 딸 비티에게 “우리 애기”라고도 “안녕, 엄마”라고도 한다. 심지어 아들 니키를 유혹의 눈길로 보는 바람에 난감하게도 만든다. 실없는 소리 1인자 니키는 엄마의 눈길을 물리칠 말들을 속사포처럼 떠들어 댄다. “고마워요, 엄마.” “반가워요, 엄마.” “낳아줘서 고마워요, 엄마.” 루스 덕분에 가족들은 울고 또 웃는다.  


“조금 더 늦었더라면 네 아빠를 잊었을 거고, 조금 더 빨랐더라면 너무 그리워했을 테니까 지금이 완벽한 때야.”


극 중 루스의 대사다. 이 뭉클한 대사로 인해 나는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병으로 정의한 알츠하이머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기실 루스는 남편 버트의 장례식에서도 누가 죽었는지 모르겠노라며, 버트를 먼저 보내고 난 후에는 문득문득 누군가 빠졌노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루스가 자신의 병을 오롯이 느끼는 순간들이었다. 루스 때문에 다시 모인 가족은 서로 마주한다. 루스는 딸 비티에게 너에게 좋은 엄마가 됐어야 했었다며 한숨짓고, 버트는 처음으로 찾아간 아들 니키의 술집에서 “죽이는 맨해튼”이라며 격찬하고, 비티는 딸 엠마에게 미안하다고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한다.      


‘왓 데이 해드’에는 루스가 좋아하는 사진들로 꾸민 크리스마스 트리가 등장한다. 가족의 소중한 순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그들이 가졌던 것에 대한 답지이기도 하다. 아픔은 가족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다시 일으키기도 한다.      


지금, 덜 행복해지기 싫은 미지의 누군가에게 꼭 추천하고픈 작품이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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