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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Nov 05. 2019

바로 그곳

문라이트

영화 ‘문라이트’ 스틸컷./ 사진제공=CGV 아트하우스

샤이론(알렉스 히버트 분)은 뒷걸음질 친다. 그리고 부서질 듯한 그의 마음을 드러내는 바이올린 선율이 화면으로 쿵 내려앉는다.      


배리 젠킨스의 ‘문라이트’(2016)는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소제목이 붙는 3부로 이뤄져 있다. 샤이론의 이름 그리고 어쩌면 이름보다 더 그를 상징하는 별명으로 이뤄진 소제목들은 오롯이 주인공에게 집중되어 있다. 가난과 마약에 찌든 엄마(나오미 해리스 분)와 게이라며 놀리는 소년들은 그의 삶을 옥죄고 있다. 마약판매상 후안(마허샬라 알리 분), 후안의 연인 테레사 그리고 친구 케빈만이 숨통을 트여주며 일상을 유지하게 만든다. 스크래치북을 나무펜으로 긁어내면 블랙에서 색색이 드러나는 풍경처럼 그의 상처도, 사랑도 점점 더 세밀하게 화면 가득 차오른다.       


후안은 오래전 쿠바에서 달빛 아래에서는 흑인 아이도 푸르게 보인다고 했던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를 어린 샤이론에게 들려준다. 자신이 뭐가 될 지 결정해야 할 때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말라고도 당부한다. 그가 화면에서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도 그의 대사는 샤이론 뿐 아니라 관객의 마음에도 따라붙는다.       


또 음악이 단순한 배경색이 아니라 때로는 강렬한 대사로 묵직하게 치고 들어오는 영화다. 파도처럼 음악이 마구 출렁거린다. 그 음악에 취해 있다 보니 불쑥 아주 잠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어느 하루에 음악이 흐른다면 어떤 음악들로 채워질까. 샛길로 빠진 상상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문라이트’가 선사한 보너스 같았다.      


대학 때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매료돼서 컴퓨터로 한 줄 한 줄 고스란히 옮겨 친 적이 있다. 필사하듯이. 그 순간만큼은 셰익스피어도 되고, 햄릿도, 오필리아도 그리고 클로디어스 왕도 되었다. 이 영화에서 꼭 그렇게 옮겨 쓰고 싶은 장면이 있었다. 3부 블랙의 쿠바음식점 신이다. 음식점의 출입문 종소리가 은은하게 퍼지며 성인이 된 샤이런(트래반트 로즈 분)이 들어선다. 음식점 안에는 다른 손님들도 있지만 공기처럼 그저 흐르고 케빈과 샤이런에게 눈을 뗄 수가 없다. 둘의 대화와 눈길 그리고 ‘Hello Stranger’라는 노래로 응축된 이 신은 참으로 완벽하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배경이 되는 나라나 지역을 가보고 싶었던 적이 많지는 않다. 그러나 작가 혹은 감독의 시선이 길게 머문 곳을 가보고 싶었던 적은 종종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청부업자’의 식당이 그러했고, 영화 ‘카사블랑카’(1942)의 릭이 운영하는 ‘카페 아메리카’가 그러했다. 다음에 가보고 싶은 곳은, 마이애미에 위치한 케빈이 셰프로 일하는 쿠바음식점이다. 출입문 종소리를 들으며 입장하는 순간, 다른 공기가 나를 맞이할 것만 같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248429

*텐아시아에 실린 칼럼을 다듬어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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