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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Apr 05. 2020

모두가 한마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맞대고

배우 문소리

문소리가 대한민국 최초 국민참여재판을 책임지는, 강단 있는 부장판사 김준겸 역으로 돌아왔다. 법대 위 판사석에 앉은 김준겸 판사는 문소리의 표현처럼 마치 아그리파(석고상)와도 같다. 그렇지만 문소리는 이번에도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는, 똑소리 나는 연기를 보여준다. 범상한 캐릭터도 비범한 캐릭터로 탈바꿈하는 연기를. 영화 ‘배심원들’(2019)의 개봉을 앞두고,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문소리를 만났다.     


완성된 영화는 어떻게 보았는지?

내가 묻고 싶다. 어떻게들 보셨는지? (웃음) 나는 기술시사 때 보고, 그 다음에 다시 안 보고 싶어 하는 편이다. 기술시사 때 보면 아쉬운 점도 많이 보이고, 개인적 감상에 앞서서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갈까 뭐 이런 부분이 걱정도 되고…. 원래 걱정이 많은 타입이다. 그런데 언론시사 때 다른 배우들이 많이 보고 같이 이야기를 나눴는데, 우리 배우 모두가 우리 영화를 참 좋아했다. 우리가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영화가 나온 것 같아서 기뻐했다. 서로의 캐릭터를 채워주는, 세워주는, 만들어주는 그런 연기를 주고받은 것에 대해서도 좋아했다.     


부장판사 역할을 위해서 현직의 여성 판사들도 만났다고 들었는데 반영이 되었나?

그냥 내 말투다. 재판을 참관하러 법원에 가서 보면, 판사 분들마다 말투가 다 다르다. 판결문도 각자 쓰는데 문체가 다 다르다. 은유를 포함해서 쓰는 분도 있고, 문장을 굉장히 길게 쓰는 분도 있고, 좀 짧게 쓰는 분도 있고. 그분들이 나에게 당신 같은 타입의 판사가 있을 법하다 그러면서 “부장님! 부장님!” 하셨다. 내 안에 있는 말투 중에 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신뢰감 있는 목소리와 말투, 톤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마지막 선고하는 장면이 마지막 촬영일이었다. 그때까지도 명확한 수위, 느낌을 다 결정한 상황이 아니어서 고심을 했다. 조금 더 참회하는 심정으로 해야 할까, 조금 더 카리스마 있게 강단 있게 시원하게 결론을 내려주는 톤으로 갈까 고민했다. 두세 번의 리허설을 해보고 ‘이거다’라고 결정을 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법을 대표하는 상징물 ‘정의의 여신상’이 문득 생각났다. 김준겸 판사 덕분이었다. 재판장의 책임을 진, 즉 재판의 무게중심인 인물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의미 깊었다. 그 역할을 문소리라는 배우가 했기 때문에 더더욱.

감사하다. (웃음) 이 인물은 사실 배심원들이 보기에는 법조인으로서 권위도 있고, 부장판사라서 보수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법원장이나 사법부에서 볼 때는 말 잘 듣고 권력 지향적인 길을 걸어온 사람이 아니다. 그런 것들이 재판의 과정에 담겨서 미묘하게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실제 시나리오에는 김준겸 개인을 보여줄 수 있는 신들도 좀 있었다. 편집의 과정에서 좀 덜어냈는데, 재판의 과정 안에 모든 것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인물이 나중에는 변화한다.

    

그렇다. 전체 이야기 속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는 인물은 김준겸이다.

초심을 생각하면서 큰 변화를 이끌어내는 인물이다. 꼼짝할 수 없는 법대 위에서, 마음만으로 내면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여차하면 8명의 배심원들 활약이 너무 커서 밸런스가 잘 맞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그런데 완성된 영화에서는 밸런스도 괜찮았고, 모두의 승리, 즉 모두의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 같아서 괜찮았다.      


영화 ‘배심원들’ 스틸컷./ 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8명의 배심원들에게서 슬쩍슬쩍 그들의 개인적 삶이 묻어난다. 이에 반해 김준겸 판사는 컴퓨터 배경화면의 아이 사진으로 그녀가 기혼녀이고, 아들이 있겠구나 짐작만 가능할 따름이었다. 그녀에게도 개인적 삶이 있겠구나 싶은 순간이기도 했고. 인물을 빚어내는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초반에는 그런 것들이 좀 더 있어야 이 인물이 관객들에게 잘 이해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법부를 대표하는 면도 갖고 있지만, 인간 즉 개인 김준겸에 대해서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했다. 직장 여성으로서 또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사법부 안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들에 공감되는 면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이야기로, 신으로 펼쳐낼 수 없으니까 다 담고 적절한 때에 쓰윽 배어나오면 좋겠다는 바램이었다. 모든 캐릭터가 다 그렇지만 이 인물은 안으로 훨씬 집중하는, 생각의 흐름이 크고 많은 캐릭터였던 것 같다.      


캐리어를 직직 끌고 오던 첫 등장에는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던데?

그렇다. 밤새 준비하고, 출근해서 늘 있는 옷으로 부랴부랴 갈아입고, 재판에만 집중하는 그런 인물의 면이 사실 처음부터 보인다. 전문직 커리어우먼 룩으로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법원장 역의 권해효와는 특히 호흡이 착착 들어맞았다. 가족 느낌이었다. 이를테면 법원 패밀리? (웃음)

영화 ‘다른 나라에서’(2011)에서 권해효 선배님이 남편이었다. 만삭 시절 찍었던 영화인데 재미있었다. 그때 배가 너무 크고, 양수도 많고, 아기도 크고 해서 보는 사람마다 곧 나올 것 같다고 불안해했다. 변산반도의 작은 어촌 모항에서 찍었는데, 아침마다 운동 삼아 동네를 두 바퀴씩 걸으면 동네 할머니들이 전부 다 어디서 낳을 거냐고 물으셨다. 거기서는 애 낳으러 병원에 가려면 두세 시간 걸린다면서. 아기를 많이 받아보신 할머니는 자기가 애를 받겠다고 하시고, 다른 할머니에게 광어 넣고 미역국을 끓이라는 둥 서로 의논까지 하셨다. 그때가 출산 예정일 2주 전이었다.     


그런데도 촬영장으로 간 건가?

그렇다. 가서는 재미있었다. (웃음) 내가 모항을 간다니까, 남편(장준환 감독)이 “아휴, 부르는 사람이나 부른다고 가는 사람이나… 몸조심 해야 될 텐데” 걱정을 많이 하면서 보냈다. 권해효 선배님과는 그 전에 연극도 한 편 같이 했다. ‘광부화가들’이라고. 인연이 있다. 편한 사이고.      


두 사람의 시간들이 연기에 묻어나온다.

권해효 선배님이 워낙 코미디를 잘하신다. 극적으로.     


예전에 조수향 배우와 가진 인터뷰에서 ‘배심원들’의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스크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배우들의 찰떡호흡이 극의 몰입도를 끌어올렸다. 특별출연인 청소요정 김선영까지.

마법 같은 연기를 펼치고 사라졌다. (웃음) 사실 모든 영화 현장이 어려움도 있고, 막힐 때도 있고, 날씨가 더워서 혹은 추워서 힘들 때도 있다. 그렇지만 이번 현장은 저 혼자 살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어떻게 잘 만들어나갈지 하는 고민을 늘 같이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맞대고 했다.     


배우 문소리./ 사진제공=씨제스엔터테인먼트

                      

신인감독의 작품임에도 쟁쟁한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감독님한테 그랬다. 신인감독인 당신의 놀라운 능력 중 하나는 이 캐스팅 조합이라고. 모두가 각자의 몫을 충실히 했을 뿐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을 든든히 받쳐주었다. (박)형식이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 작품으로 귀한 경험을 얻어간다고. 같이 연기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형식이도 너무 좋았다고 했다.     


현장의 홍승완 감독은 어떠했는지?

감독님이 배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 장점을 잘 끌어냈다.      


‘배심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김준겸 판사와 한 팀인 태인호, 이해운이 맡은 ‘판사들’도 있었다. 판사팀의 호흡은 어떠했는지?

현장에서도 나의 왼팔, 오른팔처럼 양쪽에 딱 앉아 있었다. 위치도 안 바꾼다. 심지어 회식할 때도. (웃음) 나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줬다.     


마지막 판결에서 주심판사, 배석판사인 그들이 김준겸 판사를 향해 보낸 눈빛이 참 좋았다.

쫑파티를 하고, 이해운 배우의 손을 잡고 너무 고맙다고 했다. “네가 보내준 눈빛이 김준겸이 어떤 사람인지 절반 이상 만들어주고 완성했어.” 이해운 배우가 무한한 신뢰와 존경을 그 짧은 연기에 다 담았다. 내가 이걸 받아도 되나 싶을 만큼. 고마운 연기들이었다, 두 배우 다. 연기는 리액팅이 핵심이다, 나의 캐릭터는 주변 사람들의 연기가 만들어주는 것이다, 라고 책에는 원론적으로 써 있지만 다들 그렇게 연기를 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번에 너무나 완벽하게 일어났다. 배우 일을 하면서도 흔치 않은 순간인데 너무 고마웠다.      


배우들 간의 돈독함이 말끝에 묻어나온다.

끝나고 나서도 서로 보고 싶어 하고, 무대인사 못 간다고 아쉬워하고…. 출연진이 많아서 버스 두 대는 빌려야 하니까. (웃음) 단톡방도 하나가 아니라 배심원팀, 법조원팀 따로 따로 있다. 한번은 (조)수향이가 합칠까요 물어서 지금 시스템이 잘 갖춰졌으니 이대로 가자고 했다. (웃음)      


배우 문소리가 아닌 감독 문소리로서 차기작을 만날 수 있는지?

직업인으로서 감독이 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직업으로서는 배우로 충분하다. 그냥 개인 문소리로서 어떤 이야기가 내 마음에서 생겨날 수는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잘할 것 같고, 영화로 만들면 더 좋을 것 같고 그러면 한번 해볼 수도 있는데, 큰 투자를 받아서 판을 크게 벌려서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여배우는 오늘도’(2017)처럼 내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황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경우의 수가 적다. 연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어두었지만, 계획된 바는 없다.      


전작인 장률 감독의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의 송현 역도 참 특별했다. 보통 배우의 눈짓에 집중하기 마련인데, 손짓과 발짓을 포함한 몸짓까지 집중하게 만드는 연기였다. 영화마다 자신만의 캐릭터를 숙성시키는 과정이 있는지?

그 감독한테 푹 담근다. (웃음) 그 감독의 세계 안에 푹 빠져있으면, 감독이 만든 캐릭터와 내가 만나서 케미컬한 작용이 일어나면서 무언가 만들어진다. 감독님들의 주문보다 나는 많이 움직이는 편이다. 어떤 감정이 들거나 감정의 변화가 있거나 어떤 분위기에 빠지면 몸을 쓰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감독님들이 하셨다. 몸짓이 있다는. 어떤 영화에서는 단점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을 재미있어하는 감독님들은 그 리듬이 몸에서 느껴진다고 하셨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386578

*텐아시아에 실린 인터뷰를 다듬어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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