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지후
박지후가 출연한 ‘벌새’(감독 김보라)는 제23회 부산영화제 넷팩상, 제69회 베를린영화제 제네레이션 14+ 대상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25관왕의 영예를 차지했다. 그녀 역시 ‘넓은 폭과 복잡성을 내포한 미묘한 연기’라는 극찬과 함께 제18회 트라이베카 필름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국제장편영화 부문)을 수상했다. 박지후는 1초에 90번의 날갯짓을 하는 벌새처럼 안간힘을 내는 14살 소녀 은희 역으로 스크린을 향해 힘껏 날갯짓을 하며 들어섰다. ‘벌새’(2018)의 개봉을 앞두고 서울 사당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지후(17)는 앳된 목소리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짚어 나갔다.
완성된 영화는 어떻게 보았는지?
부국제(부산국제영화제) 때 큰 스크린으로 처음 봤다. 그 전에 감독님이 편집된 것을 파일로 보내 주셔서 보면서 많이 울었다. 그 상황에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연기했는지 생생하게 기억이 나서 뿌듯하기도 했고, 감격스러워서 울었던 것도 같다. 기뻤다.
‘벌새’의 시나리오는 어떠했나?
(오디션)2차 보기 전에 통대본을 받았는데, 일단은 전체적으로 은희가 이끌어가는 것이라서 좀 더 흥미를 느꼈던 것도 같다. 처음 은희를 봤을 때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계속 읽다 보니까 진짜 보편적인 아이구나 싶었다. 내가 느꼈던, 이성한테 설레는 감정이나 부모님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감정들이 다 드러나는 평범한 학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14살 은희 역을 연기할 때 실제 나이는?
15살이었다.
1994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은희라는 인물을 어떤 식으로 빚어냈는지?
나랑 같은 나이인 10대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시대만 다를 뿐이지 감정은 같다고. 그래도 은희 특유의 분위기나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 쓸쓸한 마음을 조성하기 위해서 영화나 드라마도 챙겨 보고, 음악도 잔잔하거나 무거운 쪽으로 들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대사 위주가 아니라 지문이나 은희의 감정을 분석하기 위해서 계속 읽었다.
참고가 되었던 작품을 꼽자면?
감독님께서 추천해 준 영화였는데 ‘하나 그리고 둘’(2000) ‘렛 미 인’(2008) ‘로제타’(1999). 특히 ‘로제타’가 좋았다. 가장 비슷한 나이대인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였는데, 그 친구의 반항심이나 방황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라서 감독과 배우 간의 긴밀한 협업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현장에서는 어떠했는지?
오디션 때도 1차는 대본 위주로 했지만, 2·3차는 대화를 많이 했다. 학교생활이나 시나리오 이야기. 촬영 전까지 감독님 댁에서 1박도 하고 같이 시간을 진짜 많이 보냈다. 감독님이 대본 이야기를 많이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에 대해 계속 알아가려고 하셨다. 현장에서도 최대한 은희의 모습에 내가 비슷하게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마지막 테이크는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주셨다. 믿고 기다려 주셔서 든든하게 촬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웃음)
왼손잡이다. 영화에서 왼손잡이를 부러 강조하지 않음에도 표정, 손짓, 몸짓에 계속 눈길이 가더라. 아마 범상한 듯해도 비범한 구석이 있는 은희라서…. 심지어는 걸음걸이로도 은희의 감정이 읽혔다.
진짜요? 의도한 것은 남자친구랑 있을 때는 그 시간을 멈추고 싶은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아서 최대한 느릿느릿하게…. 이 순간순간을 기억하면 좋겠다는 마음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던 것 같다.
은희와 지완(정윤서 분)은 손만 잡고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나는, 사랑스러운 커플이다. 귀여운 첫키스 신이었다.
키스신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네이버에 ‘김유정 키스신’ ‘김향기 키스신’을 검색했다. 처음에는 걱정이 많이 됐는데 이건 연기라는 생각으로 했다.
X언니, X동생을 하자고 하던 후배 유리(설혜인 분)의 1학기 진심도, 2학기 변심도 흥미로웠다. 요즘 학생들도 이러한 관계들이 있는지?
초등학교 때 ‘양자매’는 있었다. ‘X자매’의 발전 단계인 것 같은데 양언니, 양동생으로 불렀다. 신기했다. 친구가 양언니 생일이라서 화장품을 사줬다고 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첫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은희가 순간적으로 층을 착각해서 다른 집 앞에서 절규하는. 무언가를 갈구하며 찾아가는 은희의 여정을 상징하는 것도 같던데.
그 신을 촬영할 때, 은희가 되게 불안감에 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가족들이 자기를 버리고 떠났을까봐 그러한 생각이 든 것도 같고. 어쨌든 은희가 오해를 한 상황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항상 가지고 사는 은희가 애잔하기도 했다. 또 자기 집을 찾아갈 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은희는 교실에서 아이들이 자신을 향해 밉살스럽게 두런대는 이야기를 다 듣고도 자는, 혹은 자는 척하는 아이다. 은근 강심장이랄까?
은희가 당차다는 생각은 들었다. 또 열정적일 때는 되게 열정적인데, 그런 열정은 나랑 비슷하다고 느꼈다. 은희는 마냥 친구가 없거나 의기소침한 아이가 아니라 ‘마이 웨이’가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무덤덤하게 자기 갈 길을 가는.
은희가 반에서 담임에게 날라리 색출로 뽑혔을 때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콜라텍도 자주는 아니어도 가는 것 같고, 심히 어색한 포즈로 담배도 피고…. 은근한 날라리인가?
(담임)선생님이 그런 말을 한다.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 지금 학생들은 노래방 가는 것이 일상이다. 학교 마치면 스트레스 풀러도 가고. 그 당시엔 노래방 가는 아이가 날라리라니…. 만일 내가 1994년에 있었으면 날라리였겠단 생각도 들었다. (웃음)
후렌치 후라이처럼 패스트푸드를 좋아할 나이대에 감자전을 야무지게 먹는 은희가 인상적이었다.
지문에 은희가 감자전을 허겁지겁 먹는다고 되어 있었다. 그게 진짜 배가 고파서일 수도 있고, 마음속의 허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앗간 집 딸 운운하며 지완의 엄마와 삼자대면 하는 장면은 재미있었다. 아침 드라마에서 익숙한 그림을 성장 영화에서 마주하니까 신선했다.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어떠했나?
(웃음) 진짜 아침 드라마 같은 느낌도 났다. 은희 입장에서는 지완이가 그래도 자기한테 올 줄 알았는데 엄마한테 순순히 끌려가는 것을 보니까 배신감도 들고 이런저런 감정들이 들었을 것이다. 촬영 끝나고 나서는 많이 웃었던 걸로 기억한다.
은희가 우연히 마주친 엄마(이승연 분)를 쫓는 장면은 참으로 애달팠다.
“엄마 엄마” 하고 부르는 그 신은 인상 깊은 장면 중의 하나다. 은희가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넋 나간 사람처럼 맴돌다가 간다. 은희가 엄마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했다가 튕겨나가는 느낌도 들었다. 가까워지려고 해도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 그래도 뒤에 엄마가 감자전을 해주고,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친다. 그 장면에서 다 풀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로에게 애잔했던 감정이 있던 것 같다. 서로 표현을 안 하다가 감자전을 먹으면서 눈을 마주치고 잠깐의 따뜻함을 공유하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에서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김새벽 분)는 유일한 어른, 진짜 어른 같은 존재다. 은희로 하여금 스스로의 마음을 살피게 하는. 그래서인지 스크린에 두 사람이 함께하면 가장 편안해 보였다.
김새벽 배우님이 은희한테 하는 대사가 진짜 나에게 하는 대사로 가슴에 와 닿았다. 새벽 배우님의 눈빛과 목소리도 정말 좋았다. 덕분에 더 몰입이 되었던 것 같다.
은희는 수술 후 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 목에서 제거한 혹의 거취를 궁금해 한다. 은희에게 혹은 각별했던 것인가?
그 혹이 생겼기에 엄마한테 관심을 받았고, 병원에 들어가서 사람들한테 애기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전까지는 주목받지 못하는 아이였는데, 그 혹으로 인해서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정들었던 혹이 막상 사라졌다고 하니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씁쓸했을 것도 같다.
극 중에서 ‘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라는 말이 나온다.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능히 몇이나 되겠는가’라는 뜻이다. 주변에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있나?
아무래도 가족. 가족은 1순위에 드는 것 같다. 그 다음으로 단짝 친구들. 그 대사는 나도 답을 생각해보게 되는 대사였다.
단짝 친구들은 ‘벌새’를 봤나?
아직 못 봤다. 개봉하면 꼭 보겠다고 했다.
생각이 풍부한 열일곱 같다.
음, 생각을 많이 하기 보다는 오히려 덤벙댄다. 그래서 다이어리를 쓴다. 쓰면서 지나갔던 일들을 회상하고, 감정을 적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1994년에 14살이었던 은희가 2019년 지금 어떤 모습으로 성장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혹 상상해 본 적은 있는지?
최근에 상상한 건데 은희는 여전히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귀 기울이고, 지완이를 찼던 것처럼 사이다 같은 쿨함도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은희도 만화학원 선생님이 되지 않았을까? 영지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살려서.
그러고 보면 은희가 “널 좋아한 적 없어”라고 딱 선을 긋는, 첫사랑 마침표도 좋았다. 첫사랑을 해봤나?
연애 경험이 없다. (웃음)
은희가 극 중에서 ‘120일 기념송’ 카세트테이프를 만든다. 만약 이 다음에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는?
설레는 풋풋함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노래. 치즈라는 가수의 ‘좋아해’.
2년 후에는 고3이다. 대학에 진학한다면 연기를 전공하고 싶은가, 아니면 다른 분야의 공부를 하고 싶나?
연영과를 가고 싶기는 한데, 그래도 혹시나 다른 일도 해볼 수 있으면 경험을 더 쌓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최대한 학업과 병행해보고 선택의 폭을 넓히려고 한다. 심리학과 쪽도 생각해 보고 있다.
지난 4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18회 트라이베카 필름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넓은 폭과 복잡성을 내포한 미묘한 연기’라는 극찬을 받았다.
(필름 페스티벌에는)시험 기간이라서 못 갔다.
아, 말만 들어도 안타깝다.
학생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만약 현장에 있었다면 어떤 수상 소감을 했을 것 같은가?
그냥 말이 안 나왔을 것 같다. 완전 놀랐을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나에 대한 평가를 대단하게 해주셔서 과분하고, 아직까지도 실감이 안 난다. 전화로 소식을 받은 날, 등교하고 있었다. 내가 입은 맨투맨에 뉴욕이라고 적혀 있었다. 진짜 신기했다, 그날은.
‘벌새’를 보게 되면 자꾸 스크린 앞으로 몸이 가까워진다. 은희의 감정에 솔깃해진다고 할까?
은희의 대사가 많지는 않다. 대사를 치기보다는 눈빛이나 표정으로 나타내야 되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은희가 어떠한 감정을 가졌는지 많이 생각했다. 감독님께서 디렉션을 많이 주셨고, 항상 내가 감정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셨다.
1초에 90번의 날갯짓을 하는 ‘벌새’는 ‘은희’를 표현하는 더할 나위 없는 표현이자 제목이다. ‘벌새’라는 제목이 어떠했나?
처음에는 벌새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냥 새 종류 중의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다 촬영하고 나니 벌새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은희가 살기 위해 몸부림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관계들이. 그리고 ‘벌새’ 촬영이 끝나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를 봤는데 거기서 벌새는 대단한 새라고 하는 대사가 나오더라. 지금 내 잠금 화면이기도 한데, 되게 반가웠다. ‘그렇지, 벌새는 대단한 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405713
*텐아시아에 실린 인터뷰를 다듬어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