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교회의 추억
음악 편식이 심한 나는 가스펠-CCM 편식도 심하다. 뒤늦게 스포티파이 구독을 시작하고 그보다 더 늦게 '한국 가수들 음악도 있겠구나' 싶어 내 신앙의 평생을 함께한 박종호, 조수아, 예수전도단 부흥 앨범부터 검색했다. 파일로도 CD로도 찾아 듣기 쉽지 않아 유튜브에서 한땀 한땀 모아두곤 했는데, 가지런히 디지털로 정렬되어 있는 걸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평소 북미 CCM을 마치 팝송처럼 틀고 살다가도 문득 한국어 찬양이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 있다. 그 때 내게 필요한 건 요즘의 멋진 찬양팀 밴드 음악들보다, 아이 낳고 한동안 다녔던 대형교회의 웅장한 라이브 음원보다, 어릴 때부터 1X년 악기 반주로 함께했던 강변교회 대예배 시간의 찬송가들, 간단한 편곡으로 기도하며 준비했던 헌금송 시간의 찬양들이다.
오늘은 어린이가 찬양팀 준비로 아침 일찍부터 교회를 가야 했다. 중등부 정도의 청소년 예배 시간에 학생들의 지원을 받아 기타 키보드 보컬 드럼으로 찬양팀이 있는데, 얼마 전부터 사운드 엔지니어링에 관심을 가진 어린이가 전문가 형의 '보조'로 찬양팀에 합류했다. 딱 내가 초등부 성가대 발표 때 바이올린 독주로 참여했다가 대예배 반주로 착출발탁되었던 시기이다.
당시 우리 집은 하루종일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초등부나 중등부 같은 또래 예배와 대예배(교회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른데, 아무튼 어른들 참석하는 본 예배)를 모두 다 참석하고, 성가대 연습이나 반별 성경공부나 외부 활동까지 같이 할 만큼의 시간을 절대 보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소 속상한 마음으로 대예배 반주 시간을 선택했다.
그 후로 주일예배는 나에게 긴 시간동안 '주말 아르바이트' 와 같았다. (돈을 받았다는 얘기가 아니다) 항상 학자같은 설명으로 자세하게 성경 말씀을 들려주시는 목사님의 설교도, 신나는 비트나 서정적인 선율보다 그저 교과서의 합창음악 같기만 한 어른 성가대의 찬양도 별로 재미가 없었다. 어떤 날은 설교 시간 내내 소설책을 읽었고 어떤 날은 슬쩍 예배당을 빠져나가 문구점을 실컷 돌아다녔다.
그런 보잘 것 없는 마음가짐과 태도에도 불구하고 동네의 작은 교회였던 우리 교회에서 나는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목사님은 종종 찬송가를 부르다 말고 3절은 바이올린과 피아노 오르간 반주로 듣자고 청하셨고, 성가대 언니 오빠들의 독창으로 헌금 기도를 하는 시간에 내 독주도 빠지지 않고 순서에 올랐다. 대예배 참석하시는 모든 어른들이 나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고맙다고 하시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사랑을 많이 받으면 그대로 자라게 된다는 걸 나는 강변교회에서 배웠다. 나의 내면이 얼마나 날뛰고 모났는지 아무도 흉보지 않았다. 그저 예쁘다 예쁘다 하실 뿐이었다. 내가 발을 헛디뎌도 아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은 일요일이면 자석처럼 되돌아가 붙는 주일예배 찬송가 연주 시간과, 교회를 들어가고 나올 때 인사를 나눠주시는 수많은 얼굴들의 다정한 인사와 기도 덕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많이 지났다. 나는 바이올린을 그만두었고, 진로를 바꾸고 사는 곳을 옮기며 낯선 세상으로 탈출했고, 관성처럼 참석하던 주일 예배의 의무도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무념무상 기계적으로 반복했다고 생각한 수백곡의 찬송가와 찬양이 내 안에 라이브러리처럼 차곡 차곡 저장되어 있었다.
악기를 그만두고서야 만난 울타리 밖의 세상은 그야말로 정글이었다.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의 난관이 끊임없이 다가왔고 나는 계속 넘어지고 지쳤다. 뭘 찾아가기도 생각하기도 힘든 때 갑자기 내 안에서 오랜 찬송가들이 튀어나왔다. 그냥 문득, 지금 이 상황에 너무 잘 어울리잖아, 하면서 마치 BGM을 고르는 심정으로 떠오르는 찬양들이 있었다. 굳이 입 열어 부르지 않아도 귓가에 노래가 흘렀다.
예전에 누군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찬송가) 연주할 때 어떻게 음악적 표현을 해석하는지. 나는 오히려 조금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던 생각이 난다. 찬송가 노래를 같이 부른다고, 연주곡처럼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맞다. 나는 가요를 들어도 가사부터 듣는 사람이고 팝송을 들어도 어떤 텍스트 구절이 귀에 꽂혀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사 없는 재즈나 클래식은 일할 때 노동요로 잘 틀어두지만 가사 있는 음악은 절대로 업무나 독서 배경음악으로 듣지 못한다. 글자를 '속으로 읽는' 성향상 가사랑 겹치면서 집중이 잘 안되기 때문이다. (피곤한 타입)
그러니까 나는 십수년 동안 주일예배 시간에 찬송가와 찬양집을 연주하면서 속으로 항상 노래를 부른 것이다. 입을 열고 소리내지 않았을 뿐 (턱을 괴는 악기 하면서 불가능하잖아요) 나는 그 찬양을 모두 '부르고' 있었다. 호흡도 연결도 쉼표도 나에게는 말과 똑같았다. 가사가 있는 음악이라 내겐 그게 당연했고, 그걸 뭔가 기악적인 연주의 강약으로 생각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렇게 부른 찬양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가늠도 되지 않는다.
오늘 이른 아침부터 교회를 가는 길에 조수아 씨의 찬송가 100 앨범을 틀었다. 그리고 다시 깨달았다, 100곡, 6시간이 넘는 이 앨범에 들어있는 찬송가가 내 기억 메모리에 모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내가 방황하고 있을 때, 위로가 필요할 때, 기쁨이 넘칠 때, 감탄이 튀어나올 때,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기도가 수많은 노래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나는 어린이를 대단한 신앙의 자녀로 양육하려고 교회의 틀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다만, 음악을 좋아하는 어린이가 문득 문득 삶의 순간에 떠올릴 수 있는 찬양이 어딘가 많이 저장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너무 죄송하지만) 아이 유치원 즈음부터 이 교회, 저 교회 '찬양팀이 좋은 = 내 취향에 맞는' 곳을 찾아다녔다.
지금 내가 캐나다에 와서 마음 붙인 교회도 딱 그렇다. 기왕이면 어린이가 음악으로 접점을 만들게 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시큰둥하게 예배를 따라 다니던 어린이가 '사운드 엔지니어링' 얘기를 꺼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그래 그렇게 가까워지는 거야. 그렇게 배우고,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내려놓게 되는 거야. 내가 다 줄 수 없는 보호와 사랑,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넓고 큰 계획, 그 안에 네가 들어가는 거야.
바이올린 하던 시절의 많은 감각이 이제는 추억 너머로 사라졌지만 기도 시간 끝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목마른 사슴' 찬양을 짧게 반복하던 순간이나 단상 위에 올라 헌금송을 연주하던 몇몇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얼마나 특별한 축복을 내가 누리고 살았는지 그 긴 세월 쌓인 사랑과 기도가 얼마나 나의 삶을 단단하게 지탱해주고 있는지 - 하다못해 커리어 인터뷰를 할 때에도 '제가 운이 좋아요, 복이 많아요' 하는 건 바로 이 얘기다.
오래 전 초등부 성가대 꼬마였던 나를 대예배 피아노 언니 옆에 앉혀주신 존경하는 故김명혁 목사님, 교과서처럼 배운 신앙이 역동하는 관계로 살아나도록 이끌어주신 청년부 김종군 목사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무조건 주셨던 성가대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언니 오빠들 (성함을 다 언급하지 않지만 다 기억하고 있다, 잊을 수가 없으니까) - 저의 삶은 강변교회의 모든 분들께 빚지고 있습니다.